모든 세상사(事)는 우선순위가 있다. 예컨대 인간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걷기 전에 기어 다니기가 먼저고, 달리기 전에는 걷는 것이 우선이다. 인간의 성장이 그렇듯이 자연의 만물도 마찬가지다. 모든 과일은 열매를 맺기 전에 꽃이 먼저 피고 역시 그 이전에 싹 트기가 있어야 한다. 이런 단순한 자연의 원리, 순서를 어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고전 『맹자(孟子)』의 ‘공손추(公孫丑)’ 상(上)에 나오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중국 송나라에 어리석은 농부가 있었다. 농부는 논에 벼를 심었는데 남의 논에 심어있는 모보다 자라지 않자 궁리 끝에 빨리 자라라고 모를 하나하나 벼의 순을 뽑아주었다. 어리석은 농부는 집으로 돌아와 부인에게 ‘내가 오늘 벼가 자라는 걸 도와주고 왔소.’라고 말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그 벼들은 모조리 말라 죽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렇다. 이를 '발묘조장'(拔苗助長)이라 한다. 즉, 모든 일에는 순리(順理)가 있는데 이를 어기면 오히려 일을 망친다는 교훈이다.
이는 인간관계에도 마찬가지다. 어느 가족의 사례를 들어 보자. “아버지, 상황이 안 좋은데 아이들도 병원에 오라고 하시지 그러세요?” 암이 점차 말기로 향해 갈 때 아들은 암 환자인 아버지에게 말했다. 환자에게는 가족들이 옆에서 간병하면 여러 가지 좋은 효과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간병하느라 지친 보호자는 잠깐 쉴 수 있고 환자는 오랜만에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손주들은 할아버지가 얼마나 힘겹게 투병 생활을 하는지 직접 볼 수 있다.
그러나 대개 그러하듯이 암 환자들은 가족들을 병원으로 부르지 않는다. 특히 중고교생 자녀나 손주를 둔 환자들이 더욱 그렇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의 가족들이 자신의 암 투병으로 인해 상처받을까 걱정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학교 공부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고3 가족이 있으면 입시 공부에 영향을 줄까 봐 병원 근처에도 못 오게 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아이들이 공부하느라 바쁘다고. 공부에는 때가 있다고.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이고 잘하는 것일까? 우선 이 말은 틀렸다. 공부에 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입시에 때가 있는 것뿐이다. 오늘날은 평생교육 시대다. 즉, 공부에는 때가 없고, 평생 하는 것이다. 입시 공부를 1년 미룬다고 해서 인생에는 생각보다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공부에는 때가 없지만 죽음에는 때가 있다. 특히 가족의 죽음 앞에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죽음을 피할 것이 아니라 자라는 아이에게도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이 아이의 성장을 위하는 길임을 어른들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도 일부러 피한다.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만 앞서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지나고 나서야 후회한다. 가족들에게 평생 남을 가슴속 한(恨)의 크기를 짐작하지 못한 채.
우리는 예부터 명문가에선 격대교육(隔代敎育)을 소중히 여겨왔다. 격대교육(隔代敎育)이란 “조부모가 손자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부모 대신 세대를 걸러 교육을 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손자녀가 조부모 방에서 지내며 예의범절과 삶의 자세를 배우는 것이 전통이었다.
기대치가 높고 욕심이 많은 부모보다 눈높이 교육과 관찰에 있어서 조부모가 더 유리함을 간파한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조부모의 투병 과정을 지켜보며 성장하는 아이들은 소중한 것을 배우게 된다. 예컨대 인생을 살다 보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불행을 알게 된다. 어떤 가족은 어려움을 끝까지 함께하면서 그에 맞서 나간다. 아무리 힘든 일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니 지난 후에 후회하는 것보다 지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격대교육은 해외에서도 검증된 교육 방법이다. 격대교육을 통해 성장한 인물들이 많다. 외할머니의 편견 없는 사랑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전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외할머니와의 대화와 독서가 성장의 바탕이 된 빌 게이츠 등도 격대교육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단순 지식 전달 시스템인 집단교육과는 달리 격대교육은 조부모가 손자녀를 가르치는 단순한 지식과 관련된 사항뿐만 아니라 조부모의 연륜과 인맥·자산·손자녀에 대한 사랑이 겹쳐진 모든 분야에 걸쳐 훌륭한 인재를 길러낼 수 있는 양질의 교육이라 본다.
필자는 40년 가까이 지난 세월에도 아직도 트라우마가 있다. 중3, 고3에 각각 할머니, 어머니와 영원히 이별했다. 그때도 고교와 대학입시를 이유로 위의 가족과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가족의 마지막 모습조차 지켜보지 못하고 눈물로 지새운 세월은 진정으로 어린 자녀와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필자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에게 인생 공부가 입시 공부보다 덜 중요한 걸까? 아니다. 입시 성적 1점보다 덜 중요하단 말인가? 아니다. 학교 공부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우리는 아이들이 이런 것을 배우게 허락하지 않는가. 아이들이 인생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상사는 우선순위가 있다. 순리를 어기면 부정적 결과, 상처, 후회를 남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