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와 문화든 가난을 언급하는 말들이 많다. 우리에게도 ‘가난은 임금도 구제를 못 한다’라는 말이 있다. 가난은 우리 인류와 더불어 불가분의 관계였다. 따라서 가난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경제행위로 연계되고 이것은 문명의 발달을 초래하여 인류는 현재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보유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가난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라는 말이 널리 인용된다. 하지만 전반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아직도 가난과 굶주림으로 지구촌 많은 곳에서는 인류가 존중받지 못한 채 고통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에게도 불과 몇십 년 전의 일이 생생하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성행할 정도로 먹을 것이 부족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한 시즌을 살았던 빈궁했던 이야기는 이젠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국민을 배불리 먹이는 게 정치의 근본임을 위정자들은 잘 안다. 따라서 각종 선거철이 돌아오면 유권자들에게 온통 경제문제를 부각하면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를 외친다. 이에 국민들은 이를 해결할 구세주라도 되듯이 온통 경제 우선 정책을 가진 후보에게 표를 던진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은 날로 심화되어 가고 있다. 기업과 개인에게도 부의 세습에 따라 가난은 갈수록 심화되어 가진 자는 더욱 갖게 되고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 경제 살리기의 최대의 장애물이 정치인들의 부패, 무능이 훨씬 압도적이기 때문에 정치가 가난을 더욱 조장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가난을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현대의 가난은 개인이 게으르고 능력이 없어 가난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정치, 사회의 제도적인 측면에서 가난을 극복할 수 없는 판을 키우기 때문에 개인의 능력과는 함수관계가 크게 떨어진다. 이른바 흙수저, 금수저 논란이 그것이다.
불행하게도 지금의 청년들, 즉 우리의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더 잘 살 수가 없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다. 각종 화려한 스펙과 능력계발로 우리 역사상 가장 똑똑한 젊은이들에게 이 무슨 날벼락 같은 말인가? 그들의 완전한 스펙 갖춤이 가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에 필자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보다 이제는 내면의 모습, 이른바 내면의 가난을 경계할 때임을 주목한다. 이런 관점에서 엠마누엘 수녀의 '풍요로운 가난'을 탐구해 보고자 한다..
말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를 보고 “왜 저 아이는 짚더미 위에 누워있어? 라고 엄마에게 질문을 하던 소녀가 있었다. ”저 아이는 이 세상의 많은 아이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자기도 가난하길 원한 거야“ 라는 엄마의 대답은 신비한 가슴의 울림을 주고 불에 새긴 글자처럼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어려서부터 불공평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를 감싸 안는 사랑을 인지한 성탄절의 기억은 훗날 소녀로 하여금 수도서원을 하고 평생 사랑으로 가난을 선택해 이웃에게 헌신하게 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엠마누엘이라는 단어가 바로 자신의 세례명이 되었다. 그녀는 세상의 곳곳에서 파렴치한 행동을 직접 눈으로 본 증인이다. 그리고는 심하게 분노한다. "나는 한 마리의 괴상한 오리다. 아흔두 살의 나이에도 부당해 보이는 것만 보면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꼭 분노의 온천 같다" 고 말했다. 끊임없이 가난이라는 추한 현실을 보고 소리쳐 울부짖었다. 울부짖는다는 것은 항거하는 것이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요, 무기력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태로 남아있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엠마누엘 수녀는 빈민 구호 단체 ‘엠마우스’의 창시자 피에르 신부와 더불어 프랑스인들로부터 가장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피에르 신부와는 달리 엠마누엘 수녀는 이집트, 수단, 터키, 튀니지 등 소외되어 있는 나라와 지역을 중심으로 빈민가 사람들과 동고동락해 왔다. 2008년 66%의 지지를 얻어 프랑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성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녀는 행동하는 프랑스의 양심이었다. 10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한 세기를 관통하는 진정한 서사시와도 같은 그녀의 삶의 이야기는 강렬한 의미를 지닌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위선적이다. 엠마누엘 수녀는 “행동하기에 앞서 생활하고 귀 기울이고 함께 나누면서 빈민가에서 보낸 5년의 세월 덕분에 나는 사람과의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게 되었다”라고 고백했다.
'풍요로운 가난'은 다소 역설적으로 보이는 엠마누엘 수녀의 저작으로 전 지구적인 차원에 걸쳐 부당하지만 결국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난이라는 불의에 대해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가난이 지닌 긍정적인 측면을 물질적 풍요의 폐해를 줄이는 처방전 혹은 행복한 삶의 원천으로 전환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나의 존재는 보잘 것 없으며,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결코 의미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이다”라는 생각이야말로 무엇보다 근본적인 빈곤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 어떤 곳에서든지 가난한 이의 가장 절박하고 기본적인 욕구는 존중을 받고싶다는 것이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자기 운명의 주인이란 의식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인가? 엠마누엘 수녀에 따르면 그 방법이 구체적이다. 우선 결핍된 것들에 실용적으로 접근하되, 그들이 자립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원조를 삼가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나눔은 적선이 아니라 지구 전체에 걸친 부의 정당한 분배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가난은 지나친 무거움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자기가 처한 어느 곳에서든지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에서 자신을 성찰할 것을 말하기도 한다. 타인들과 비교하지 말고 우리가 가진 것과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을 참으로 향유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적인 관계, 즉 이해관계를 떠난 교류를 즐기고, 주변 사람들과 진정으로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존재 방식이 바로 삶의 분출이요 풍요로운 것이라 한다. 역설적으로 행복의 길이 열리는 것은 헐벗음 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일찍이 칼 마르크스는 "사치는 가난이나 마찬가지로 악덕이며, 우리들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데에 있지 않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인류 속에 존재하는 자는 행복하다. 왜냐면 행복은 혼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안의 진짜 인간, 헐벗은 인간, 우애 깊은 인간, 타인과의 관계를 가장 큰 재산으로 여기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버릴 줄 아는 자는 진정한 가난을 행복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법정 스님은 한때 특유의 '무소유' 사상으로 발전시켜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내면적인 가난은 행복하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고 성경 역시 말하지 않는가. 이는 참다운 인간으로 살아가는 원초적인 조건이 될 수 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세밑이다. 올해도 우리 주변에서 많은 빈곤한 자들의 고통과 죽음을 보아왔다. 이제 중요한 것은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그들을 찾아내고 관심을 가져 삶의 의지를 꺾지 않고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는 말을 단지 위로 차원에서 소환하기 전에 기꺼이 가난을 선택하는 '내면의 가난'이 결국 풍요로운 삶을 가꿀 수 있는 기반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이는 시대의 흐름으로 볼 때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흔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작금의 물질주의에 물든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참으로 중요한 지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