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삼락회(이하 삼락회)라는 단체가 있다. 퇴직교원들의 모임인데 사단법인 전국단위 조직이다. 중앙에 한국교육삼락회가 있고 시도삼락회가 있고 지역삼락회가 있다. 여기서 삼락이란 배우는 즐거움, 가르치는 즐거움, 봉사하는 즐거움이다. 캐치프레이즈에 추구하는 목표와 활동내용이 드러나 있다.
얼마 전 도단위 삼락회장 선거가 있었다. 두 명의 후보가 나와 경선을 했다. 당선 윤곽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한 기세에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필자는 도 임원인데 여기서 선관위원을 맡아 경선과정과 결과를 시종일관 지켜볼 수 있었다. 대신 필자에게는 선거의 중립과 공정성 유지를 위해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았다.
삼락회장을 투표로 뽑는다? 삼락회 사정을 아는 사람에게는 기이한 일이다. 중앙회장은 경선사례를 몇 차례 보았다. 그러나 시도회장과 지역회장 투표는 못 보았다. 대개 유능한 후임자를 지명하든가 아니면 추대형식으로 하든가 그래도 없으면 억지로 떠넘기는 것이 관례였다. 회장 자리를 자진해 맡으려는 사람이 드물고 자리를 탐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권한이나 이득이 있는 자리도 아니고 회원을 위해 봉사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역회장 후임을 못 구해 수 년 째 맡는 경우도 흔하다.
필자도 교직은퇴 후 삼락회 지역국장으로 또 도삼락회 임원으로 총 7년간 활동했다. 우리 도의 경우, 삼락회 정관에 회장은 초등과 중등 교대로 하게 되어 있다. 현 회장이 초등인 관계로 후임엔 중등 출신이 회장을 맡아야 한다. 헌데 마땅한 후임이 없나 보다. 현 회장이 나에게 회장을 권유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필자가 적임자고 다른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 한다. 과연 내가 회장 자격이 있을까? 회장으로 침체된 삼락회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 몇 달을 고민했다.
필자가 내린 결론은 '아니다'였다. 개인적으로 인생 멘토 역할을 하는 회장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 인간적 도리가 아니다. 그러나 냉철하게 거부하였다. 거부 명분은 올해 코로나 확진으로 시력이 급격히 감퇴하였다. 신문이나 스마트폰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평상 시 주 5일 문화교실 강사다. 강의와 삼락회 일을 병행할 수 없다. 리더십이 부족하다. 기울어져 가는 단체를 일으키기엔 역량이 부족하다. 나의 인적 네트워크가 불비하다. 따라서 회장이 되면 책임감에 홀로 뛰어야 한다. 신입회원을 영입할 묘책이 없다. 사멸하는 조직을 애처롭게 쳐다만 보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어깨를 짓눌렀다.
결국 12월 5일, 회장 선거 공고가 떴다. 지역회장 한 분이 주위 추천으로 후보로 나왔다. 나이 64세이니 소장파다. 현직 때 경력이 화려하다. 장학관 경력에 전국단위 고등학교장 회장도 맡았었다. 보수교육감 만들기에 큰 역할을 했다. 젊음의 패기와 의욕이 넘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삼락회 경력이 짧다는 것. 또 한 후보가 나타났다. 79세로 삼락회원 경력도 있고 퇴직 후 문화원장, 지역장학회 이사장 경력도 있다. 마지막 봉사 기회를 달라는 호소에 의지가 강하게 보인다.
출마 서류를 제출한 후보자를 대상으로 선관위 설명회를 가졌다. 깜깜이 선거를 막고자 아이디어를 냈다. 마치 대통령 선거처럼 제대로 치르기로 했다. 후보자에게 4가지 홍보자료를 주문했다. 벽보 포스터, 홍보물, 후보자 영상물, 찬조자 3인 영상물. 한 가지는 선관위에서 준비하는 후보자 토론회 녹화 영상물이다. 이 정도라면 유권자 알 권리가 존중되고 후보자도 본인 알리는데 충분하다고 보았다.
선거인단 단체카톡방을 만들어 선거 관련 공지사항을 알리고 후보자가 제출하는 홍보물을 탑재했다. 선거인 요구에 따라 한 후보는 이력서를 올렸다. 다른 후보도 올렸다. 한 후보 벽보 포스터는 대선후보 같았다. 찬조 동영상도 프로급으로 만들었다. 아마추어가 만든 홍보자료는 내용은 좋았지만 전달에 한계가 있었다. 삼락회 단체방인 사랑방과 업무방에는 후보자가 추천하는 회원이 입장하여 지원사격 경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필자의 관심은 누가 되느냐가 아니었다. 누가 삼락회를 살릴 후보이며 그 후보가 과연 유권자의 선택을 받느냐였다. 리포터이기에 설명회 때 기호를 뽑은 후보를 촬영해 선거 홍보를 하였다. 희망교육사랑 카페에도 탑재하니 회원들의 조회 수가 500회를 넘었다. 이번 경선이 삼락회 홍보의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교직에 있는 아내는 처음엔 나이만 보고 후보자 성패를 생각했는데 사진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막상막하라는 것이다.
선거 기간 중 회원들의 지지 댓글에 따라 몇 차례 후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경우도 있었다. 후보토론회 영상 녹화에서는 어깨띠까지 준비했다. 공통질문 4가지를 사전에 배부하였건만 처음이라 그런지 후보자가 답변을 소화하지 못해 원고를 보고 읽는 경우도 있었다. 해프닝도 있었다. 상호토론 때에는 상대방 질문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해 녹화가 중단된 경우도 있었다. 질문에 상대방의 허를 찔러야 하는데 맨탕질문이거나 반복질문을 하여 토론회를 지리하게 만들었다.
사랑방과 업무방에서는 지지자들의 연이은 지지 선언으로 선거에 열기를 더하였다. 때론 감정이 섞인 거친 언사가 탑재되기도 하고 이에 따른 반격도 있어 긴장이 조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지성인답게 정해진 선을 넘지는 않았다. 상대방의 공격도 지지자들은 후보자를 대신해 부드럽게 넘기는 지혜를 발휘했다. 역시 한평생 교육에 몸담은 교육자다웠다.
드디어 12월 27일 투표일이다. 이사회 회의장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유권자에 대한 소개 방법을 두고 후보자간 신경전도 있었다. 한수 이북에서 온 투표자, 80이 넘어 몸이 불편한 분은 지팡이를 짚고 왔다. 60대 유권자는 소수였고 대부분 70대, 80대가 유권자다. 지역회장과 사무국장, 본부임원 등 선거인단 39명 중 26명이 투표에 참가했다.
투표장은 옆방에 설치했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대여한 기표소, 투표함을 준비했다. 후보자가 추천한 참관인은 투표와 개표상황을 지켜보았다. 필자는 선거인 명부 대조를 맡았는데 신분증을 확인하고 투표용지를 교부하였다. 투표는 12시까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드디어 개표. 누가 도삼락회의 수장이 될 것인가? 참관인과 함께 개표장면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처음엔 노장이 앞섰다. 소장 참관인의 실망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다가 나중엔 엇비슷해졌다. 계수를 하니 노장 11표, 소장 15표. 아슬아슬하게 소장의 승리다.
도삼락회장은 회의장에서 유권자들에게 선거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승자는 패자에게 명예회장으로 추대할 것을 권유했다. 같은 삼락회원으로서 화합으로 함께 가자는 것이다. 당선소감 발표도 있었다. 선배 교육자님 잘 모시겠다는 다짐과 함께 엎드려 큰절을 올리기도 하였다. 단톡방에는 두 후보자의 감사 인사말이 탑재되었다. 선거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다.
후보자는 당선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본인이 내세운 공약을 실천해야 한다. 무엇보다 기울어져 가는 삼락회 조직을 살려야 한다. 당선자는 운영 예산 확보, 도삼락회 사무실 및 시군 조직 정비, 교육봉사 역할 강화, 회원 조직 확대와 활성화, 활동영역 확대 강화, 카페 활동 활성화 등을 약속했다.
이번 선거를 지켜보면서 삶을 성찰하게 한다. 출마 동기는 과연 순수했는가? 욕심(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상대방이 나를 거칠게 밀어 붙일 땐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은가? 감정이 폭발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유권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가? 나는 평상 시 인간관계를 잘 맺고 있는가? 진정한 동료애를 발휘할 친구를 몇 명이나 갖고 있는가? 나는 타인에게 얼마나 베풀며 살고 있는가? 나는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여러 가지 깨달음을 갖게 해 준 선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