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함께 살아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사태를 극복하면서 ‘함께 또 따로’라는 삶의 의식이 싹트고 있다. 이 말은 언뜻 듣기에는 이중성을 내포한 모순이다. 함께는 뭐고 또 따로는 무엇이란 말인가? 흑과 백의 논리처럼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일찍이 공자가 말한 군자의 행동 원리인 ‘화이부동(和而不同)’과 일맥상통한 것이라 할 것이다. 또한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란 행동 원리와도 맥을 같이하는 논리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이, 이것이 바로 관계의 아름다운 거리라면 우리는 얼마나 마음의 울림을 얻을까?
최근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인위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참으로 고육지책이었다. 그럴수록 오히려 가족, 친지의 소중함을 간절하게 느낀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왜냐면 믿고 의지할 존재는 가족과 혈족밖에 없다는 것에 애착이 증대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도 단일민족을 내세웠던 우리이기에 동족(同族)이라는 말은 아무리 이념의 장애가 가로막는다 해도 이면에서는 한민족의 남다른 ‘정’을 나누며 공존번영의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남과 북으로 양분된 상태로 역대 지도자들이 정치적 결단을 나누었음을 기억한다. 그럴 때마다 한순간이나마 복잡한 정치 관계를 떠나 순수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예컨대 남북 적십자 회담을 통한 이산가족 상봉을 보라. 거기엔 인간의 본능에 따라 이념적, 정치적 거리두기가 한순간은 자연스럽게 무너져 내린다. 이렇게 혈족과 가족의 정은 거리가 없다.
그러나 끈끈한 가족애, 천륜지정(天倫之情)으로 대표되는 고정관념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밀착된 가족이 건강한 가족이라 할 수 있을까? 남보다 못하게 지내는 가족도 불행하지만, 너와 나, 가족끼리의 경계도 없이 서로 간섭해서 불편을 주는 가족은 전형적인 한국 가족의 병폐다. 지나친 가족주의는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온정주의나 이기적인 ‘가족 사업’으로 변질되어 사회문제를 일으킨다. 그래서 가깝고 소중한 관계일수록 적당한 거리,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면서 ‘함께 또 따로’의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현재처럼 ‘초연결사회’에서 살아가는 상황에서는 한, 두 단계만 거치면 우리는 모두와 연계되어 살아간다. 이는 인간만이 갖는 관계의 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함께 또 따로’의 바람직한 관계란 말인가? 우선 부부의 경우를 보자. 요즘 부부의 삶이 서로의 취미나 운동을 즐기면서 함께하는 활동을 늘려나가는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여 자기만의 시간을 즐기기도 하지만, 부부 공동의 시간으로 소원한 관계를 복원하여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자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결혼한 자녀와 부모가 같은 아파트에 살더라도 층을 달리하거나 다른 동에 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엔 가족이니까, 부모니까 모든 걸 다 용인할 것이란 비현실적인 기대를 내려놓는 현명한 지혜가 담겨 있다. 또한 가족 간의 에티켓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가족을 방문할 때도 약속을 미리 하고 가는 것 말이다. 상호 간의 일상적인 삶의 패턴이 중요하여 이를 깰 경우는 사전에 상호 조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3년에 걸쳐 장기적으로 진행된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고 맞이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학교는 더욱 밀접하게 교사와 학생 간 관계의 힘을 길러야 한다. 연대와 협력이라는 미덕은 호모 사피엔스가 생존해 온 인류 공영의 비결이었다. 하지만 각자 자기 주도적인 삶을 통한 강력한 주체 의식으로 ‘자립갱생(自立更生)’을 더욱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공동체적 삶과 윤리는 더욱 밀착되고 더욱 건강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학교라는 교육 공동체 내에서 ‘함께 또 따로’라는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하는 새로운 학교 공동체 규범(New Normal)을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