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이번 학기에 우리 에세이 쓰기 할 거야. 그것도 10시간에 걸쳐서!”
“헐! 샘!!”
아이들의 원성이 교실을 울렸다. 충분히 예상한 바였으므로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자, 오늘은 그 첫 시간! 샘이 너희들을 생각하면서 편지 한 통을 썼지. 한 번 들어 볼래?”
10차시의 글쓰기 수업을 안내하는 첫 시간, 전날까지 고민하며 고쳐 쓰기를 반복한 편지 한 통을 읽었다. 편지에는 내가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우리에게 글쓰기가 필요한 이유, 여러 갈래의 글 중에서 에세이를 쓰고자 하는 이유, 함께 쓸 글쓰기 주제를 두루 담았다. 단순 전달이 아닌, 함께 글을 쓰며 마음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잘 전해지도록 단어를 고르고 골라 쓴 편지였다.
낭독이 끝나자, 교실 가득 박수 소리가 울렸다. 편지를 읽었다고 박수를 받다니! 아이들은 편지에서 진심을 느낀 게 분명했다. 박수는 그에 대한 답이었으리라. 원성 가득하던 교실 분위기가 단번에 온기로 가득해졌다. 여전히 염려하는 눈빛을 보내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는 아이들도 있었다.
마음의 먼지 털어내는 좋은 도구
새 학기 수업을 준비하면서 아이들과 에세이 쓰기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내가 맡은 학년은 고2, 진학에 대한 압박으로 매일이 불안하고 두려운 아이들이었다. 고민과 걱정이 많지만, 누구에게도 선뜻 마음을 드러내놓지 못하는 아이들이기도 했다.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마음이 힘들 때, 글쓰기로 마음의 먼지를 털어냈던 나로서는 글쓰기보다 좋은 도구를 알지 못했다. 이럴 땐 내가 국어교사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시나 소설을 쓸 수도 있었겠지만, 좀 더 일상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었다. 살아가는 동안, 고민과 걱정을 털어놓을 도구가 필요할 때 ‘글쓰기’를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만큼 실제적인 글쓰기를 시도하고 싶었다. 에세이는 쓰기 방법이 (시나 소설에 비해) 단순하지만, 솔직한 경험과 감정을 담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마냥 쉬운 갈래는 아니다. 하지만 자기감정을 쏟아내는 도구로서는 그 이상의 갈래도 없었다.
글쓰기 수업의 주제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에 대한 글쓰기’였다. 평소 좋아하는 것을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하는 아이들에게 마음이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묻고 싶었다.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에세이 중 ‘아무튼 시리즈’를 샘플 도서로 선정했다. 아이들에게도 ‘아무튼 00’이 있다면 힘겨운 지금을 버텨낼 힘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차시를 거듭하며 아이들은 자기만의 ‘아무튼 00’을 찾아갔다. 아이들의 ‘아무튼 00’은 생각보다 더 다채로웠다. 고등학생들이 좋아하는 한 가지라고 했을 때, 흔히 떠올릴 만한 ‘게임, 아이돌, PC방, 스마트폰’은 별로 나오지 않았다. ‘노래, 친구, 산책, 봄, 여름, 바다, 가족, 애니메이션, 해질녘, 새벽, 그림 그리기, 다이어리 쓰기’ 등. 예상 밖의 소재도 많았다. 아이들이 이런 곳에 기대어 살아가는구나, 싶었다.
아이들은 자신이 정한 주제로 세 시간 동안 세 가지 에피소드를 글로 풀어냈다. 첫 시간에는 갈피를 못 잡고 나의 적극적인 도움을 구하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두 번째 시간부터는 얼마나 진지하게 글을 쓰는지, 교실에는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 울렸다. 나는 글쓰기 코치로서 아이들의 글에서 좋은 부분을 짚어주고, 어느 지점에 막혀서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아이들과 대화해 글의 물꼬를 틔워주었다.
초고 쓰기에 이어 고쳐쓰기까지 완료한 후, 대망의 마지막 시간! 낭독회를 열었다. 교실의 책상을 모두 뒤로 밀고, 의자들만 중앙에 동그랗게 놓아 낭독회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시작 전에 글쓰기 과정을 지켜본 나의 소감을 담은 글을 먼저 읽었다. 열 시간 동안 누구 하나 포기하지 않고 무사히 글쓰기의 항해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와 감동을 담은 글이었다. 덕분에 아이들은 조금 더 진지한 태도로 낭독회에 참여했다.
“지친 삶을 위로받은 시간”
아이들은 자기가 쓴 글 세 편 중 한 편을 골라 읽었다. 상황에 따라 일정 부분만 골라 읽는 아이도 있었다. 한 명 한 명 낭독이 끝날 때마다 교실에는 공감의 끄덕임과 잔잔한 박수 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열 시간에 걸친 에세이 수업이 끝이 났다.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에 대한 글쓰기였지만 꽤 많은 아이가 자신의 아픔을 글에 담아내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었다. 힘들고 지칠 때, 그 마음을 위로해준 무언가를 좋아하는 거였다. 늘 무선 이어폰을 꽂고 있는 아이들은 음악에 기대어, 친구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 아이들은 친구에 기대어,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아이들은 계절과 하늘빛에 기대어 녹록하지 않은 날들을 버텨내고 있었다.
활동이 끝난 후, 아이들의 소감을 받았다. 에세이 쓰기 수업 이후에 받은 소감이라 그런지 소감마저도 한 편의 에세이처럼 진솔하고 따듯하게 써준 아이들. 그중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 나갔나 싶을 만큼, 활동 의의를 정확하게 알아차려 준 두 아이의 소감을 소개한다.
“이 활동은 고등학생에게 정말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그것을 좋아하게 된 과정은 무엇인지 등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보통 친구들에게는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고, 힘든 일이 있는 친구들에게는 어쩌면 좋아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어 지친 삶 속에서 위로가 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활동 전에는 내면의 얘기를 하는 것이 꺼림칙했다. 하지만 글로 쓰고 마지막에 친구들 앞에서 발표도 해보니 내면을 얘기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고 꺼림칙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업을 받는 학생으로서의 한걸음이 아니라, 진짜 어른으로서 한 걸음을 내딛는 수업이 된 것 같다.”
글쓰기 수업이 ‘지친 삶을 위로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말해준 아이, ‘진짜 어른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수업’이라 평가해준 아이. 덕분에 나도 글쓰기 수업 내내 위로받았고, 앞으로는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진심을 알아봐 주고, 마음을 드러내놓기에 주저하지 않은 아이들 덕분에 봄처럼 따스한 수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함께 해준 아이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우리가 수업을 통해 나눈 마음은 성적으로 환산할 수 없을 거야.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불현듯 우리가 함께 했던 이 봄이 떠올랐을 때, 너희들의 마음에도 볕이 들면 좋겠다. 너희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샘은 정말로 행복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