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장기간의 코로나19로 인해 마음에 상처가 있거나 관계 맺기가 어려운 청소년들로 인해 어려움을 호소하는 부모들이 많아졌다. 그들이 우울증에 빠져 정서적인 극복이 필요한 경우가 갈수록 늘어났기 때문이다. 성장의 과정과 코로나 시기가 겹친 청소년들은 이미 깊어진 상처가 그들 내면의 많은 잠재력을 갉아먹고 있다.
그 대표적 실례로 요즘 고교생의 자퇴가 늘고 있다. 그 이면에는 대학진학을 위한 내신 성적에서 불리한 학생이 검정고시를 선택하고자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문제는 공동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많아지는 데에 있다. 따라서 그들의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에 힘들어하는 부모와 교사들이 갈수록 증가하는 현실이다. 심지어 아이의 자퇴 요구에 시달리던 어느 학부모는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야~”를 외치며 협박하는 자녀에게 “더는 시달리고 싶지 않다”거나 “아이가 측은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다”고 두 손을 들고 자퇴 동의서에 기꺼이 도장을 찍기도 한다.
이처럼 과거에는 부모가 자녀의 학습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인지능력에 관심이 높았다면 이제는 학습의 스트레스와 심리적 불안정,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처하기 위한 정서적인 면, 즉 아이의 정서 여부에 집중하고 있다. 왜냐면 청소년의 불행과 행복의 정서는 그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우리나라는 매년 5만 명을 훨씬 상회하는 아이들이 ‘학교 밖 청소년’의 굴레로 내던져진다. 최근에는 의대 광풍에 의한 대입 N수생의 증가가 가파르다. OECD 국가 중에 청소년 자살률이 최근 지속적으로 최상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청소년들을 우리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 중에 혹자는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그대로 놓아두면 행복할 것 아닌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결론은 이 세상에 그냥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장석주 시인도 ‘대추 한 알’이란 시에서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태풍 몇 개 / 저 안에 천둥 몇 개 / 저 안에 벼락 몇 개 //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 저 안에 초승달 몇 개...”라고 노래했다. 하지만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되는 것이 딱 하나 있다. 예컨대 예쁜 꽃밭을 망치고자 한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마구 짓밟거나 파헤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러면 잡초가 무성하여 결국 저절로 황폐해진다.
초저출산 시대에 알파세대(~중학생까지의 10대 아동)인 아이들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부모인 MZ 세대(20~30대 젊은 부모)뿐만 아니라 모든 기성세대의 마음이다. 여기에는 ‘행복한 아이가 행복한 어른을 만들고 행복한 나라를 세운다’는 사상이 필요하다. 따라서 가정과 학교에서는 행복을 유발하는 행동 유형(예컨대 ‘당장 행복하길 원한다면 타인을 도와라’ ‘나눔과 배려는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의 필수조건’)들을 잘 이해하고 연습과 행동으로 반복케 하는 지속적인 ‘행복교육’이 필요하다. ‘행복도 하나의 습관’이란 믿음으로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경쟁교육이 가져다 준 각종 교육적 폐단으로 인해 현실 속의 우리의 청소년들은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 과거의 고진감래(苦盡甘來)형 교육으로 아직도 현재의 고통을 참고 이겨내고 훗날 좋은 학교를 나오고, 좋은 직업을 가지게 되면 그 후에는 저절로 행복할 것이라 믿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어릴 적 가슴에 남겨진 고통의 트라우마는 평생을 간다.
디지털 대문명의 시대는 누구나 창의롭고 상상력을 가지고 ‘현재를 즐기는 방식(Carpe Diem)’이 행복하고 잘 살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이제는 경쟁교육을 통해 얻은 ‘행복은 성적순이다’라는 확신에 찬 목소리에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는 저항의 목소리를 돋우어야 한다. 이렇게 ‘행복교육’은 가까이에서 시작한다. 행복의 상징인 파랑새는 이미 우리와 함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一切有心造)이며 이를 생활 속에서 행동으로 일깨우는 청소년 교육이 가히 으뜸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