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연필을 쥐고 글씨를 쓰는 것보다 손끝으로 화면을 터치하는 게 익숙한 요즘 어린이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입학 후 연필을 바르게 잡고 힘 주어 선을 긋는 것도 힘들어하는 신입생이 적지 않다. 디지털 시대, 손 글씨의 중요성이 예전 같지 않다고는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 보는 시각은 조금 다르다. 학교생활과 학습에 자신감을 불어넣는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서울 충암초(교장 박영숙)는 1학년을 위한 특색교육 프로그램, ‘한글 쓰기 교육’으로 유명하다. 충암초만의 한글 쓰기 지도법을 개발해 수십 년에 걸쳐 선배 교사로부터 후배 교사에게로 전수됐고, 현재 학교를 대표하는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2004년에는 ‘충암체 글씨본’과 ‘충암체 폰트’를 개발했다. 연구부장 한상희 교사는 “개교 이래 선배 선생님들이 지도해 온 한글 쓰기 지도법을 쉽게 활용하기 위해서 후배 선생님들이 의기투합해 쓰기 교재와 폰트까지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충암초에 입학하는 신입생은 첫 3주간 학교 적응 교육을 받는다. 학교는 즐겁고 행복한 곳이라는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는 한편, 학습을 위한 기초 체력을 길러주는 데 집중한다. ‘색연필 바르게 잡기’도 그중 하나. 손에 힘이 부족하고 소근육 발달이 더딘 1학년생들을 위한 지도법이다.
한 교사는 “이때 연필이 아니라 색연필을 사용한다”면서 “색연필로 도안 꼼꼼히 색칠하기, 줄 긋기, 곡선 그리기 등을 연습한 후 4주 차에 비로소 연필을 잡고 한글 쓰기 수업을 시작한다”고 강조했다.
충암초의 한글 쓰기 교육은 ‘사방그림’ 익히기부터 시작한다. 정사각형 모양의 칸 안에 열 십자(十) 모양의 보조선(점선)을 그린 형태다. 공간지각능력이 부족한 1학년 학생들이 초성, 중성, 종성 등 낱자의 크기와 위치 등을 어림하기 어려워 글씨를 비뚤게 쓰는 데서 착안했다. 한 교사는 “사방그림을 떠올리면서 글자를 쓰면 낱자의 위치와 크기 등을 어림하기 쉬워지고 균형감 있게 글씨를 쓸 수 있다”고 전했다.
충암체의 핵심은 글자의 형태별로 일관된 규칙을 적용한다는 점이다. 받침의 유무와 모음의 위치에 따라 4가지 형태로 구분되고, 4가지 형태별로 일관된 규칙을 적용해 글씨 쓰기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이 쉽게 익힐 수 있다. 한글날 무렵에는 ‘한글바로쓰기 대회’도 연다.
초등 저학년 시기, 왜 한글 쓰기 교육이 중요할까. 한 교사는 “기본적인 학습을 위한 첫 단추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디지털 기기의 사용으로 손 글씨를 예전처럼 강조하지는 않지만, 학생의 발달 단계를 비춰 보면 글씨 쓰기는 저학년일수록 학교생활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저학년 시기는 손의 기능이 완성되는 결정적인 시기이기도 하고요. 쓰기 교육은 손 기능을 정교하게 훈련하는 효과가 있어요. 도안 꼼꼼히 색칠하기, 색종이 반듯하게 접기, 젓가락 사용 올바르게 하기 등 숙련된 손동작을 할 수 있게 하고, 이는 곧 학습과 학교생활에 자신감을 심어주죠.”
충암초의 한글 쓰기 교육은 이미 지역사회에서 소문이 자자하다.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학부모들의 신뢰도 높다. 한 교사는 “3월 말에는 1학년 학부모님들을 모시고 공개 수업까지 진행한다”면서 “부모님의 필체마저 충암체로 바뀐 사례도 있을 만큼 반응이 뜨겁다”고 귀띔했다.
이어 “앞으로 글씨를 쓰는 기능에만 치우치지 않고 한글이 지닌 아름다움과 한글 문화유산의 의미를 새기도록 순우리말 캘리그라피 쓰기, 우리말로 동시 쓰기, 한글 디자인 공모전 등 다양한 활동으로 확장해 보고 싶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