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의 미래를 결정지으려 하지 말라”

2009.07.22 11:21:30

부모의 못 이룬 꿈 자식에 강요해선 안 돼
“養父의 인정, 믿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부모는 자녀의 미래를 결정지으려 하지 말고 꿈을 좇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워싱턴 주 4선 상원의원 신호범(74․˙미국명 폴 신)의원은 20일 이원희 한국교총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15일 강원 정선고 방문, 17일 국회 특강을 거쳐 주말을 목포에서 입양아로 구성된 성가대들과 함께 보내고 미국으로 출국하는 길, 인천공항에서 이루어진 만남에서 신 의원은 “부모가 자녀의 적성과 관계없이 진로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며 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한 한인학생이 자살한 사건을 일례로 들었다.

신 의원은 “그 학생의 일기장에는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육군사관학교에 올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비관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며 “예비역 대령 출신 아버지는 자신이 못다 이룬 장성의 꿈을 자식이 대신 이뤄주길 바라는 마음에 자식의 꿈을 꺾어 결국 이런 비극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크고 자신의 못 다한 꿈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부모 스스로 자녀들이 무엇이 되길 원하는지 알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도록 사랑으로 감싸주고 도와주라”고 충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며 자신을 입양한 아버지 레이 폴 미군 대위의 피보다 진한 사랑의 일화를 소개했다.

“아버지가 행방불명되고 어머니는 네 살 때 돌아가셔서 ‘거리의 소년’으로 자랐어요. 그러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거드는 하우스보이가 됐죠. 1952년 어느 날 밤 몹시 외로워 흐느껴 울던 저를 아버지(폴 대위․당시 미 군의관)가 발견하고 ‘네가 울면 가슴 아프다’면서 꼭 끌어안아 주셨죠.”

신 의원은 “그때 그의 포옹과 입양이 나의 인생을 새롭게 출발시켰다”고 회상했다. 그는 “한국사회의 인간 차별에 대한 설움과 증오 때문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18세에 미국으로 떠났지만 결국 나의 뿌리를 다시 찾게 됐다”고 설명했다.

“아버지는(레이 폴)은 제가 미국 생활을 힘들어하거나 난관에 봉착해 있을 때마다 My son, I believe in you.(아들아, 나는 네가 무슨 일이든지 잘해낼 것으로 믿는다)라며 격려와 사랑을 아끼지 않았어요. 독학으로 1년6개월 만에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이후 브리감영 대학을 마치고 펜실베니아대와 워싱턴대에서 국제관계 및 동아시아학 석·박사 학위를 따낼 수 있었던 건 그의 이런 격려와 사랑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즈음 그는 수소문 끝에 생부도 찾았다. 이복동생 다섯을 낳고 어렵게 살고 있었던 아버지를 처음에는 미워했지만 ‘용서’했다고 털어놨다. 1974년부터 동생들을 차례로 데려와 미국에서 교육시키고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아버지(레이 폴)가 제게 준 사랑을 동생들에게 갚은 거죠.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움을 주고 나머지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를 준 아버지의 사랑을 저도 실천한 것뿐입니다.”

대학교수로 만족할 수 있었던 그가 정치인으로 입문하게 된 계기는 인종차별이었다. 1958년 군복무 시절, 텍사스의 한 식당에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난 뒤 반드시 정치인이 돼 ‘인종차별’이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신의 뿌리가 한국인임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신 의원은 워싱턴주립대 서두수 교수(작고·한국학)를 찾아가 한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서 교수에게서 3년간 한국어를 배운 그는 “박사님이 한번은 춘향전을 번역해 오라고 했는데 정말 진땀을 흘렸다”며 “이런 경험이 한국어뿐만 아니라 문화와 역사를 더욱 깊이 공부하는 계기가 됐다”고 떠올렸다.

1993년 워싱턴 주 하원의원을 시작으로 1998년 상원의원에 당선됐고 이어 재선, 그리고 4선의원이 되면서 부의장직에까지 올랐다. 신 의원은 1998년 상원의원 선거 당시 유권자의 집을 일일이 방문했다. 지역구 내 3만2000가구를 모두 방문한 끝에 백인이 93%에 달하는 지역에서 승리를 이끌어냈다.

신 의원은 “2002년 각종 문서에 쓰이는 동양인 호칭을 ‘오리엔탈(oriental)’에서 ‘아시안(asian)’으로 변경하는 법안을 제출한 날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그는 “법률이 통과된 다음날 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셋째 아들에게 전화를 받았다”며 “흑인을 비하하는 용어를 없애려고 1962년 아버지가 워싱턴DC 의사당에서 연설했던 내용과 비슷해 눈물이 났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당선 후 워싱턴 주의 학교에서 한국어를 선택과목으로 배울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고, 미국 50개 주 모두 한국계 정치인이 1명씩 나오게 한다는 취지로 2000년 9월 한국인 2세 정치인 후원장학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2004년 첫 수혜자로 강석희 캘리포니아 주 시의원이 당선됐다. 그는 현재 어바인시의 시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치인이다 보니 자주 강연을 다닙니다. 그때마다 학생들이 10~20년 뒤에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죠. 교육이 정말 중요합니다. 더 많이 배우면 더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 정계에 진출할 수 있을 겁니다. 30년 안에 한국 출신 미국 대통령이 틀림없이 나올 겁니다.”

“가난과 외로움, 차별 속에서 어린 시절을 힘겹게 지냈지만 그때마다 꿈을 버린 적은 없었다”는 신 의원은 “나에게서 배울 점을 찾는다면 Can do와 I am possible의 정신을 평생 잃지 않고 살아왔다는 점일 것”이라고 토로하면서 다시 한 번 이렇게 당부했다.

“포기하지 않도록 옆에서 지켜봐 주세요. 부모로서, 교사로서, 아이를 강요하지 말고 믿고 인정해 주세요. 입양아에게 필요한 것이 동정이 아닌 인정이듯 누군가로부터 인정받는 것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되새겨주는 충분한 밑거름이 될 테니까요."



서혜정 hjkara@kft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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