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은 만남이다. 상대가 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제대로 된 만남이 이뤄지기는 어렵다. 질의응답을 할 때, 일화나 예를 들 때 특정 학생의 실명을 활용하고, 수업 중에 이름을 불러주면 효과가 있음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다만 문제는 여러 반을 맡을 경우 모두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이 생각보다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교수들을 대상으로 교수법에 대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참고삼아 미리 법전원생들을 대상으로 사전 설문조사를 했다. 법전원 강의 중에서 기억에 남는 강의와 그 이유를 적으라고 했다. 그랬더니 학생들은 이름을 기억하며 불러주는 교수의 강의를 가장 많이 꼽았다. 사실 이 같은 답변은 유치원생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이다.
나는 사람들의 이름, 지명 등의 고유명사나 특정 사건의 연·월·일, 전화번호 등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남들은 내가 관심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뇌리에서 금방 사라진다. 티모시 윌슨(2007)의 ‘나는 내가 낯설다’라는 책에 보니 나 같은 사람은 ‘고유명사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년기 기억상실증’에 걸려 유년기를 잘 기억해내지 못하듯이 고유명사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은 고유명사나 무작위 숫자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암기법을 동원해보았지만 크게 효과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 이름 부르기를 포기할 수는 없어서 강의 첫 시간에 A4 용지를 제공하고 거기에 자기 이름을 적어 책상 위에 올려놓도록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A4 용지는 짧은 방향으로 2번 접으면 4등분이 된다. 그 중 한 면에 이름을 쓰고 3각대 형태로 만든 후 책상 위에 놓으면 된다. 반드시 보관했다가 가져오도록 부탁하지만 가져오지 않은 학생이 있기 때문에 학기 초에는 A4 용지를 준비해 몇 번 제공해줄 필요도 있다. 책상 위에 올려놓는 것을 잊는 학생도 있으므로 내가 먼저 내 이름표를 강의용 탁자에 올려놓으면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따라한다. 일부 교수는 목걸이형 명찰을 제작해 학생들에게 제공하고 매 시간 착용하게 하기도 한다.
수업 때, 그냥 손으로 가리키며 "자네가 답해보게" 혹은 "뒤에서 두 번째 노란 셔츠 입은 학생"이라고 지명하는 것보다는 비록 올려놓은 이름표를 보고서라도 이름을 불러주면 훨씬 더 반응이 좋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면 학생들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다. 수업 중 다른 행동을 하거나 조는 학생이 있으면 일부러 그 학생의 이름을 넣어 사례를 소개하면 대부분은 문제 행동을 중단하고 수업에 집중한다. 그리고 한 학기동안 이렇게 계속해서 이름을 부르며 강의를 진행하다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는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학생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아진다.
학생들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과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김춘수의 ‘꽃’은 이름 부르기가 지닌 엄청난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해준다. 이 시를 빌어 출석 부르기와 강의 중에 학생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의 의미를 한 번 더 되새겨 보자.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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