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5일 17시 30분. 전라남도 곡성군 금성면 곡성댐 인근의 송학민속체험마을 마당에는 땅거미가 지는 어둠 속에 피어오르는 모닥불 연기가 퍼지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환담이 왁자지껄하였다. 보성남초등학교 30회 졸업생들의 졸업 30주년 기념 동창회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넓다란 마당 가운데에 자리 잡은 다섯 개의 의자에는 흰머리가 희끗거리는 다섯 명의 선생님들이 자리 잡았다.
"이제부터 보성남 30회 졸업생의 졸업 30주년 기념 동창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자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오늘 바쁘신데도 이 자리에 참석하여 주신 다섯 분의 은사님들께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일동 차렷. 경례!"
회장의 구령이 떨어지자 줄을 서 있던 50여명의 제자들은 그대로 넙죽 엎드려서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은사 자격으로 참석한 나는 그만 너무 미안하고 감격스러워서 의자에 앉은 채 잔뜩 허리를 굽혀서 인사를 받았다.
나는 이 제자들의 은사 자격으로 앞자리에 앉아서 인사를 받으면서 생각을 해보았다. 무던히도 속을 썩히던 제자들 ! 그래서 엄청나게 매도 맞았을 것이고, 꾸지람도 많이들 들었을 텐데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주는 고마운 제자들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내가 이 아이들을 만난 것은 1972년 12월5일이었다. 전임지 득량서초등학교에서 6학년 담임을 하여서 졸업사진도 찍고 중학교 입시원서도 다 마감을 해놓은 상태에서 난데없이 전보발령이 난 것이었다. 보성남초등학교가 종합시범학교인데 공석이 있어서 필요한 요원으로 발탁되어 데려가는 것이란다. 그렇게 만난 이 아이들은 4학년 1반이었다.
53명의 어린이가 있는데 부임 첫날 교실에 들어서니 아이들의 모습은 산골 나무꾼이나 진배없을 만큼 너저분하고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학급이었다. 그 동안 담임이 아파서 학급을 두 달 가까이 비워둔 채였기에 엉망이라고밖에 말이 안나오는 것이었다. 53명 중에서 50명의 손등이 갈라져 피가 베어 나올 지경이고 교실은 응달이어서 종일 햇빛이라고는 단 10분도 들지 않는 지하실 같은 곳이었다.
이런 아이들을 맡아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우선 학급아이들의 용의를 단정하게 만들고 발표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만들어 가면서 차츰 정상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5학년에 진급이 되어야 하는데, 교장선생님은 그 아이들을 그대로 데리고 올라가라는 명령이었다. 너무 소잡한 아이들이니 1년 동안 잘 좀 보살펴 주어야 하니 맡아라는 것인데 거절을 할 수도 없었다. 1년 동안 아이들과의 생활은 그런 대로 잘 적응하여 주었고 아이들도 제법 정착이 되었다. 그러니까 6학년도 그대로 데리고 가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6학년 담임까지 하게 되었다. 그, 때, 담임하는 조건으로 내게 학금 임원을 조절하게 해 달라고 해서 승낙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말썽을 피우고 있던 종수를 구제해 보려는 욕심이었다. 결국은 그 덕분에 말썽을 피우라면 더 이상 레퍼토리가 없을 만큼 다양한 말썽꾼 이 반장으로 거듭나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우수학생으로 발돋음을 하게 만들어 놓았었지. 지금도 생각이 날 것이다. 제자들 중에서 학급에 있는 만화를 가져다가 만화방에 주고 바꾸어 보았다가 반장에게 걸려서 모두 다 회수 당하고 혼이 났던 기억들을 가진 아이들이 꽤나 많다. 그 말썽쟁이가 해 놓은 업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2년 3개월 동안이나 담임을 했었던 제자들이 벌써 졸업을 한 지 30주년을 맞았고, 이제 45세 안팎의 중년이 되어서 제법 중후한 중년 냄새를 풍기는 멋진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지난 여름 방학의 끝 무렵에 퇴직 예정자 교육을 받으면서 이제 내 평생을 헌신해 온 직장에서 마지막 얼마 남은 기간 동안 과연 무엇을 해야 하며 퇴직 후엔 무엇을 하는 것이 보람 있는 삶이 될 것인가 고민하는 기간이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나이 20세에 발 디딘 교육자로서의 길을 오직 한 달음으로 달려온 42년. 그 동안 내가 직접 담임을 했던 제자들만도 약 1,000여명이나 된다.
그 많은 제자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원망하는 제자는 몇 명이나 될까? 한 명? 열 명? 백 명? 물론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결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했던 순간적인 일도 그 아이에게는 말할 수 없는 큰 상처로 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정성을 들인다고 했는데 그 아이가 어떤 오해를 가질 수도 있다. 더구나 나는 완전한 인간일 수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어찌 실수가 없었겠는가? 그리고, 그 많은 세월을 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을 앞세웠던 적은 얼마나 많았겠는가?
나는 지금도 가슴이 끔찍하도록 아픈 기억이 지금은 내 처남이 되어 있는 아이를 6학년 담임을 하면서 순전히 나의 확인 착오로 죄 없이 구타했던 일을 늘 머리에서 떠날 수 없는 실수로 이야기하곤 한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얼마나 많은 실수로 가슴에 멍이 들게 했겠는가 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디 그뿐인가? 수없이 많은 시간을 수업하면서 잘못 가르친 것은 얼마나 많으며 교사라는 신분으로는 어쩔 수 없는 정치 상황 속에서 그릇된 지식을 전달하던 기억은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 나는 이 제자들과 같이 수많은 작업을 하여야 했었고, 정부 방침에 따라 가시가 찌르는 아카시아 씨앗을 따러 다녀야 했고,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풀밭에서 손에 잡히지도 않는 잔디씨를 봉투 하나 가득 따 모으느라 진땀을 흘리기도 하였었다. 어느 날에는 잔디씨는 못 따고 연못 속에 들어가서 연밥을 몇 되는 되도록 따 가지고 온 적도 있었다.
이런 제자들이 이제 중년이 되었다. 이쯤이면 선생님이 왜 그런 일을 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이해는 해줄 수 있으리라 싶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제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고달프게 일(사역)을 시켜야 했던 담임을 이해해 주고 오히려 추억거리로 생각해 주는 제자들이 대견스럽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밤늦도록 어울려서 지난날을 되새김질하는 제자들과 어울려서 지난날을 얘기하는 것도 또한 나의 인간 수업이라는 생각으로 무려 네 시간을 그대로 함께 하였다. 멋진 추억을 간직한 채 흩어지는 제자들에게 이제는 더욱 열심히 그리고 자신감을 가지고 이 사회에서 마음껏 날개를 펴라는 부탁을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