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이나 고기잡이 또는 열매채취로 먹을거리 조달을 위해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인간에게 쌀의 발견이야말로 인간 생활의 혁명적인 변화였을 것이다. 쌀 만큼 인체에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해 주고 활력소가 되게 하는 것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쌀 농사를 지으면서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되고, 정착생활을 하면서 독특한 농경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다. 쌀과 인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생명줄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목 생활이나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기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고기나 밀과 같은 식품을 주식으로 삼고 있고, 문명의 발달로 인한 식품이 다양화되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들이 많다. 지금은 육류를 비롯하여 가공식품들을 선호하여 쌀 소비량이 엄청나게 줄긴 했지만 유달리 우리민족은 쌀에 의한 희로애락의 정서가 깊게깊게 새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옛날에는 양반이나 지주들의 땅에서 소작하던 농민들이 항상 배고픈 세월을 살았다. 원시적인 경작으로 생산량은 보잘것없었고 생산량의 대부분은 수탈을 당해 초근목피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흰 쌀밥에 대한 그리움은 한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1년 내내 농사지어 제대로 먹어보지도 못하고 대부분을 지주에게 바쳐야 했으니까
일제시대에는 일제의 수탈정책으로 많은 사람들이 부황으로 병들어 갔고,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식량 빚을 내어 먹어야 했다. 그 빚은 다시 높은 이자율 때문에 더 큰 빚으로 늘어나 그 빚을 갚기 위해 뼈를 깎는 노동을 해야만 했다. 하루 노동의 대가가 겨우 쌀 한 되 정도였다니 쌀이 얼마나 소중하고 비쌌는지 알 수 있다. 오직 먹기 위해서만 일을 했다고 할 수 있다.
6.25 전쟁을 치르면서 가난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그 여파로 6,70년대까지 쌀은 최고의 가치를 가지는 귀중한 자원이었다. 안보적 차원에서 쌀의 증산을 위한 노력을 극대화하였다. 쌀을 아끼기 위해서 혼분식을 권장하려고 학생들의 도시락을 점검하기도 했다. 농어촌의 소득증대 사업이나 품종의 개량 또는 농사법의 개발 등으로 쌀밥이 흔해졌다. 비로소 쌀밥에 대한 미련이 해소되었다. 양복은 쌀 두 가마, 소는 쌀 스무 가마 등 쌀은 모든 물품에 대한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우리 농민 거의 모두가 쌀농사를 짓는다. 쌀농사는 우리나라 농업의 가장 대표적인 농작물이다. 집약농업의 구조적 한계로 수입쌀과의 가격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대책 없는 쌀의 수입 계획으로 농민들은 위기에 처해 있다. 정부는 올해 20만5000t인 의무 수입물량을 2014년에는 기준년도(88∼90년) 국내 평균 쌀 소비량의 7.96%(40만8700t)까지 늘리기로 했다. 또 가공용으로만 공급하던 수입쌀의 밥쌀용 시판을 내년부터 허용하고, 시판물량은 2005년 의무 수입물량의 10%에서 2010년까지 30%로 확대하기로 했다.
우리나라가 쌀을 수입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각종 공산품 특히 전자제품, 자동차 등을 팔기 위해서 우리도 뭔가를 사와야 한다는 것은 다 안다. 가격 경쟁력에서 엄청난 열세인 농산물이 문제가 된다. 쌀의 수입은 절대 다수 농민들의 삶이 벼랑 끝에 몰리는 위기의식으로 이어진다. 무엇인가 대책도 없이 어쩌란 말인가!
집집마다 가득히 쌓아놓은 쌀더미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흰 쌀밥에 대한 정서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내겐 지금의 산업구조, 무역구조가 참으로 안타깝다. 하나의 정책으로 이익을 보는 산업이 있다면 마땅히 손해를 보는 산업에 대한 배려를 반드시 해야 한다. 그 이익금을 농민들에게 보전(補塡)해줘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