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추억을 그리며

2005.12.22 10:09:00

자고나면 소복하게 쌓여있는 눈이 새하얀 목화솜 같아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이다. 많이 쌓여 있을수록 마음이 편안해진다. 먼지 쌓인 세상의 모든 색깔들이 감춰졌다. 녹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래오래 하얀 세상에서 지내고 싶다. 한 움큼 뭉쳐서 지나가는 사람과 눈싸움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눈이불을 두툼하게 덮은 차들의 모습이 ‘이글루’ 같다. 차 안에 들어가면 에스키모인이 될 것 같다. 바깥세상과 차단된 겨울잠 자는 동물들의 보금자리처럼 아늑할 것 같다. 그냥 그 속에서 하루만 머물러 시간을 보내 보고 싶다. 잠도 자고 책도 읽고 조용한 노래도 들으면서…….

출근하기가 걱정이 된다. 내 차로 출근하기는 약간 겁이 난다. 미끄럼 때문에 ‘비잉’ 도는 차들을 많이 보았었다. 위험한 순간순간들을 용케 피하긴 해도 도로변에 쳐 박힌 차들을 많이 보았었다. 겁이 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 차로 출근하기로 했다.

눈 쌓인 차속에 들어가서 한 동안만이라도 머물고 싶어 눈을 쓸지 않고 살며시 도어를 열고 운전석에 앉아본다. 시동도 켜지 않는다. 어둡진 않지만 완전히 세상과 차단되어 있다. 하얀 눈 속에 들어온 기분이다. 나는 항상 내 키보다 더 많은 눈이 쌓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터널을 뚫고 눈 속을 걸어 다녀 보고 싶었었다. 이리저리 이웃집과 연결된 눈 속 터널을 따라 개미집에서 개미들이 다니듯이 쏘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눈 터널은 아니지만 눈 속에 있다. 약간 춥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따뜻하기만 하면 책을 읽고도 싶고, 다정한 친구와 전화도 하고 싶고, 한숨 자고도 싶다.

지평선이 보이는 들녘, 하얀 눈의 세계에서 연날리던 생각이 난다. 약하지만 찬바람이 불어대는 눈 쌓인 논에서 꽁꽁 언 손을 ‘호호’ 불며 연을 날렸다. 방패연이 한 점으로 보일 때까지 멀리 멀리 연을 보내고, 연싸움을 하기도 하였다. 간혹 연줄이 끊겨 한없이 먼 하늘로 바람타고 달아나는 연을 잡으려고 한참을 쫓아가지만 잡지 못하고 얼레만 들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 왔던 일도 있었다. 점심 밥 먹는 것조차도 잊고 연날리기를 했는데…….

얼굴이고 발이고 손이고 꽁꽁 얼었다. 이불 덮인 따뜻한 아랫목에 손을 넣어본다. 스텐레스 밥그릇이 손에 닿는다. 따뜻한 밥그릇을 손으로 감싸 잡는다. 얼마나 따뜻한지 가슴 속까지 열기가 전해진다. 어머니께서는 이웃집에 놀러 가셨다. 윗목에 밥상보로 덮인 김치 중심의 반찬과 따뜻한 밥을 먹는다. 시장이 반찬, 진수성찬보다 더 맛있게 ‘후다닥’ 먹어 치운다.

가끔 마을의 형들과 함께 꿩몰이를 했다. 눈 세상이어서 꿩들이 먹이를 못 먹어 날 힘이 없다고 했다. 꿩들이 걸어 다니다 보면 꽁지가 눈에 스쳐 고드름이 열린다고 했다. 꽁지는 무겁지 배는 고파 사람들이 몰면 멀리 못가고 잡힌다고 했다. 아직 어린 내가 꿩 보다 빨리 달릴 수는 없었다. 그저 형들의 뒷전에서 고함이나 치면서 따라다닐 정도였다. 여러 번 ‘푸드득’ 날아가는 꿩을 따라 쫓기는 했어도 단 한번도 잡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렇게 한 동안을 눈 쌓인 들녘을 뛰다 보면 신발 속에 들어간 눈 때문에 양말이 철떡거린다. 발가락이 몹시 시리다.

찬 기운이 몸에 젖어든다. 출발해야 한다. 시동을 켜고 눈도 쓸어내야 한다. 아쉽지만 더 이상 차속에서 그냥 있을 수 없다. 차 밖으로 나왔다. 치우기 싫은 눈을 쓸어낸다. 유리창에 두껍게 끼인 얼음판을 긁어낸다.

아직도 눈발이 날린다. 도대체 올해는 얼마나 많은 눈이 오려고…. 눈이 많이 오면 ‘풍년’이 든다는데, ‘풍년’이라는 말에 더욱 가슴 아플 농심들을 생각해 본다.
이학구 김제 부용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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