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설날이 와도 즐겁지 않지?

2006.01.24 13:36:00

또 설날이 다가오고 있다. 매스컴에 설날 제수용품 가격이 오르내리고 귀성길 교통정보가 예보되고 있다. 이렇듯 설날이 저만치 다가오면 마음이 들뜨기라도 하련만 영 그렇지가 않다. 수천만이 고향을 찾고 부모형제 만날 기대에 들떠 있는 이 명절이 왜 나는 즐겁지 않은가.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한다면 또 할 말이 없다. 내 마음이 즐겁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월 탓도 있는 것 같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나도 많이 변했고 명절풍속도 많이 바뀐 까닭이다. 예전엔 설날이나 추석을 기다리며 얼마나 마음이 설렜는지 모른다. 즐겁기만 한 명절이었다. 객지에 둥지를 틀고 살던 형제자매들이 고향집으로 내려와 차례상을 올리고 세배를 드리고 환담을 나누느라 고향집은 항상 시끌벅적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명절은 더 이상 즐겁기만 한 명절이 아니다. 고향엔 덩그러니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만 외롭고 서울 사촌 형님 댁에 모여 조촐하게 차례상을 올릴 뿐이다. 수천만이 고향을 찾는 저 귀성 행렬 속에 끼어드는 것도 한 즐거움인데 그 기회마저 잃었다.

오랜만에 고향의 오솔길로 접어들며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는 일도 잃고 말았다. 여름날이면 뒹굴며 지냈던 널찍한 대청마루, 여치 집을 만들고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고, 때로는 돗자리를 펴고 낮잠을 자기도 했던 사랑채 툇마루의 기억도 가물가물 잊혀져 간다. 함께 뛰놀던 어린 시절의 동무들을 오랜만에 만나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술 한 잔 기울이는 즐거움도 모두 옛일이 되었다.

이제 형제들은 제각기 살기에 바빠 어렸을 때의 오붓한 정이 솟아나지 않는다. 못 사는 형제는 여전히 가난하고 형편이 좀 나은 형제도 덩달아 풀이 없다. 잠시 만나 연례행사처럼 차례를 올리고 속마음은 다 풀어놓지도 못한 채 서둘러 각자의 삶터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어려운 형제는 하소연이라도 해보고 싶지만 어느 형제가 따뜻하게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는가. 먹고 살만한 형제는 또 나름대로 씀씀이가 있으니 돕고 싶은 마음도 그저 마음일 뿐이니, 탓할 일만도 아닌 것이다.

장손은 딸만 셋을 두었을 뿐이요, 어느 형제는 딸만 둘이요, 막내는 달랑 아들 하나만 데리고 왔으니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가부장적 전통문화도 이젠 빛을 잃었다. 부귀다남을 기원하던 우리의 미풍약속도 이제 많이 퇴색하였다.

제 각각 짝을 찾아 가정을 꾸렸으니 형제보다는 제 식구가 우선이지 않은가. 그 당연한 이치가 또 낯설기도 한 것이다. 형제지간의 오붓한 정은 오히려 소원해지고 각자 또 다른 추억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갈등의 소지도 없지 않아 혹자는 왕래조차 하지 않는다는 얘기도 종종 듣게 된다. 우리의 추억은 이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희석되고 희미해지기도 한다.

연로하신 부모님은 공경과 사랑의 큰 어르신이 아니라 자식들과 재산 경쟁을 벌이는 고집스런 노인들로 비춰지기도 하니 격세지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돈이 없는 부모는 홀대하고 돈이 있는 부모에겐 효도를 가장하는 부도덕한 시대의 세태를 종종 듣기도 한다.

시대에 따라 가족의 문화도 효의 개념도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새로운 가족문화 새로운 효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아름다운 명절 풍속도 새로이 마련되어야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인어른이 유명을 달리 하시고 큰아버지가 또 세상을 하직하셨다. 인생무상이라 하더니 세상이 옛 모습 그대로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장손이신 4촌 큰형 댁으로 명절 쇠러 가는 일도 그만두었으니 명절이 더 쓸쓸하기만 하다.

이번 설날연휴는 연휴기간이 짧아 벌써부터 귀성길 귀경길이 혼잡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귀성길에 오르시는 모든 분들이 고향의 푸근한 인심과 가족들의 사랑을 한 아름씩 안고 삶의 터전으로 향하시길 기원한다. 부모님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부럽기만 하다.
최일화 시인/2011.8 인천남동고 정년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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