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 있던 용은 다 어디로 갔나

2006.02.11 07:23:00

벌써 20년도 더 지난 얘기다. 그때 나는 시골의 작은 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인정이 넘치던 시절이라 학부형님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대화가 무르익으면 자연스럽게 정치인들이 안주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 반 학부형 한분이 그곳의 지역구 국회의원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불평과 불만을 심하게 늘어놓으며 번번이 대화를 단절시켰다.

그곳의 국회의원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장관까지 지낸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또 많은 사람들에게 덕망이 있는 분으로 알려져 몇 번째 의원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분이 도대체 어떤 짓을 했기에 저렇게 욕을 얻어먹는지가 궁금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서운해 하는 이유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너무나 어이가 없는 오해였다.

그 당시 우리 반 학부형의 사촌동생이 사법고시를 패스해 집안에서 잔치까지 열었다. 지역구의 작은 행사까지 잘 챙기던 국회의원은 직접 찾아가 축하를 해줬다. 축하과정에서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했고 학부형의 집안 중 한분이 그 말을 들었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고생 끝에 낙이 왔다는 것을 별 뜻 없이 표현한 것으로 그냥 흘려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우리 반 학부형의 집안은 ‘왜 우리 집안이 개천이냐?’면서 그 국회의원이 의정생활을 하는 내내 담을 쌓았다.

사실 그때 사법고시를 패스했던 학부형의 사촌동생은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요직을 맡았었고, 사회적으로 국민들에게 관심사였던 큰 사건의 담당검사였다. 이렇게 예전에는 가난한 집의 아이들 중에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역경을 이겨낸 수석입학생이나 수석졸업생의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그래서 우리네 부모들은 자신이 못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먹을 것, 입을 것 참아가며 더 자식교육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이제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은 그야말로 속담과 옛 이야기에서나 들어봐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개천에 있던 용이 어디로 도망간 게 아니다. 도회지 부잣집 아이 한명의 과외비가 일반 가정의 한 달 생활비와 맞먹는다는 얘기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일수록 기초학습부진학생이 월등하게 많다는 통계치가 말해준다. 또 많은 교육학자들이 ‘해마다 지역간, 소득간 교육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며 걱정을 한다. 정부에서도 사회 양극화에 따른 교육격차가 가난 대물림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죽하면 교육부에서 교육격차해소의 원년으로 삼겠다며 ‘올해 1조3천억원을 투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5년간 8조원을 투입해 낙후지역과 소외계층에 대한 교육안전망을 촘촘히 구축한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개천에서 용은 못나더라도 꽃은 피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일이 또 있다. 백화점의 문화센터들이 봄학기용으로 아이들에게도 다양한 이색 강좌를 열고 있다. 상업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곳이 백화점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엇인들 못할 게 있겠는가? 그중 하나가 연설 전문 강사를 내세워 학교의 회장이나 반장 선거에 대비한 연설 및 공약 제시법 등을 가르쳐주는 '새 학기 반장선거 대비 강좌' 개설이다.

전문 강사에게 연설과 공약 제시법을 배운 아이들은 뭔가 다를 것이다. 아이들의 심리를 꿰뚫어본 그럴싸한 공약을 제시하고,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언변이 유창할 것이다. 가난만 대물림하는 것이 아니라 회장이나 반장도 부자들의 전유물이 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아 왠지 씁쓸하다.

일제의 잔재인 반장, 부반장 대신 회장, 부회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명칭에서 풍기는 권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학교의 교육방침을 이해해야 한다. 일부 교사들의 학급에서는 학습도우미나 봉사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백화점의 문화센터에서 연설이나 공약제시법을 가르치며 당선시키는데만 급급하면 상업적이라고 지탄받는다. 이왕이면 학급이나 전교의 대표로서 남보다 더 많이 봉사하면서 더불어 살 수 있는 방법도 교육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이참에 자녀를 회장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안달하는 부형들에게 묻고 싶다. 솔직히 자녀에게 리더십을 키워준다는 명분을 앞세운 채 부형들이 대리 만족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한 발짝 더 앞서 출발하게 하거나 한 계단 더 위에서 바라보게 하려고 조바심하지 않아도 된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마음가짐을 가르치면 된다. 인생살이는 결코 짧지 않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면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
변종만 상당초등학교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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