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를 모르는 아이들

2006.02.18 14:39:00

아침 식사시간. 아이들 등교와 나의 출근 시간 때문에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의 손놀림은 바쁘기만 하다. 늘 그랬듯이 가족을 위해 따뜻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의 얼굴에는 행복이 묻어난다. 그런데 식사 때마다 아내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이 있었다.

"OO아, 밥 좀 깨끗이 먹을 수 없니?"
"왜요?"

"쌀 한 톨이라도 아껴야지. 농부들을 생각해서라도 말이야."
"흥, 치~."

언제부터인가 막내 녀석은 밥을 깨끗하게 먹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밥을 먹고 난 뒤 막내 녀석의 밥그릇에는 항상 밥풀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아내는 그릇에 붙은 밥풀을 떼어먹으며 녀석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믿는 구석이 있는지 막내는 아내의 말에 코방귀를 뀐다. 그러면 아내는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눈치를 보낸다.

"여보, 당신이 뭐라고 말 좀 해요. 녀석이 이제는 컸다고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해요."
"요즘 아이들 다 그렇지 뭐."

아내는 자신의 말에 나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오히려 나에게 역정을 내기 시작한다.

"당신은 선생님이면서 어쩌면 그런 말을 해요?"
"알았소. 내가 한 번 이야기해 보리다."

그 날 저녁이었다. 식탁 위에 밥상을 차려놓고 아내는 한바탕 야단법석을 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탁에는 식사를 할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면을 하고 난 뒤 나와 보니 식탁 위에는 아내가 정성 들여 만든 음식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비록 진수성찬은 아니었지만 먹음직스러웠다. 아내가 가족을 위해 이 음식을 준비하는데는 족히 1시간 이상이 소요되었으리라 본다. 그런데 아내의 입장에서는 가족의 무성의한 행동이 못마땅하게 여겨졌으리라. 조금씩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너무 지나치게 아이들 입장에서만 생각한 것이 후회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식사를 하기 위해 어른이 먼저 아이들을 기다려야 한다는 그 자체까지도 잘못되었다는 생각으로 막내 녀석의 방으로 가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안방에서 누군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나 문을 열어 보니 막내였다. 녀석은 학원에서 다녀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않은 채 침대에 앉아 TV 오락 프로그램에 푹 빠져 있었다. 순간 화가 나 TV전원을 꺼 버리려고 하자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아빠, 잠깐만요. 저 장면만 보고요."
"무슨 장면인데? 식사시간은 지켜야지. 엄마가 화가 많이 났어."

엄마가 화가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제야 녀석은 눈치를 챈 듯 조심스레 내 뒤를 따라 나왔다. 그런데 시선은 여전히 TV를 향하고 있었다. 사실 초등학교 학생인 막내 녀석은 TV를 즐겨보는 편이 아니나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오는 오락프로그램은 빼놓지 않고 보는 편이다. 그리고 자신의 우상인 그 연예인이 하는 모든 것을 따라 하곤 한다.

녀석은 식사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아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내친 김에 아침에 해주지 못한 이야기를 녀석에게 해 주었다. 먼저 그 옛날 지지리도 못살았던 '보릿고개' 이야기부터 아직까지 지구상에는 먹지 못해 굶어 죽는 아이들 이야기까지 예를 들어 이야기 해 주었다. 녀석은 내 이야기가 믿어지지가 않는 듯 조금 전 TV에서 보았던 이야기를 하였다.

"아빠, TV 오락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이 가지고 하는 과일들 진짜 맞죠?"
"그런데, 왜?"

"버려지는 과일들이 너무 많던데요. 어떤 때는 먹는 걸로 장난도 하던데요."
"TV 프로그램 상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농부들이 보면 속상할 거야. 네가 정성 들여 만들어 놓은 물건을 누군가가 망가뜨리면 속상하듯이 말이야."

내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도 녀석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눈만 끔벅거렸다. 사실 요즘 TV프로그램에는 너무 지나칠 정도로 음식물로 장난을 하는 장면이 자주 목격된다. 특히 아이들이 즐겨보는 오락프로그램에서는 그 정도가 심해 우려가 될 정도이다. 따라서 오락물을 편성하는 방송사 제작진들은 이 점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인스턴트 식품에 길들여진 요즘아이들에게 '보릿고개'라는 말은 동화에나 나오는 옛이야기로만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음식물과 우리 농산물을 경시하는 아이들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수만은 없는 일이다. 아무튼 오늘 막내 녀석의 그릇에는 밥풀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김환희 강릉문성고등학교
ⓒ 한국교육신문 www.hangyo.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 문의 : 02) 570-5341~2 광고 문의: sigmund@tobeunicorn.kr ,TEL 042-824-9139, FAX : 042-824-9140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 등록번호 : 서울 아04243 | 등록일(발행일) : 2016. 11. 29 | 발행인 : 문태혁 | 편집인 : 문태혁 | 주소 : 서울 서초구 태봉로 114 | 창간일 : 1961년 5월 15일 | 전화번호 : 02-570-5500 | 사업자등록번호 : 229-82-00096 | 통신판매번호 : 2006-08876 한국교육신문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