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학부모들의 고성으로 떠들썩한 회의실, 담임교사에게 화를 내는 격앙된 목소리, 울먹이다 무릎을 꿇은 채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며 죄인이 되는 담임교사, 분을 삭이지 못한 듯 ‘조용히 인정하고 사표내면 다 조용한다고 했잖아.’를 소리치는 학부모의 모습을 감히 상상이나 해봤는가?
TV에서 본 뉴스의 내용은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낯익은 모습이 아니었다. 군사부일체니 교육은 백년지대계니 그런 구차한 얘기를 결부시키기도 싫다. 그저 낯선 모습에 놀랐던 가슴을 추스르며 교사이기 이전에 교육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묻고 싶다.
전날 집으로 찾아가 항의한데 이어 다시 여럿이 학교를 찾아가 소란을 피우며 무엇을 얻어내고 싶었는지? 담임교사가 무릎을 꿇은 채 사과를 하지 않았더라면 도대체 어디까지 문제를 확대시키려고 했었는지? 그렇다면 담임교사의 인권과 교권을 유린해서라도 급식의 문제점을 파헤치려는 사명감이 그렇게 컸었는지? 무릎을 꿇어야 했던 담임교사를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과 귀한 딸이 겪는 슬픔을 지켜보는 부모의 심정은 생각이나 해봤는지?
누구라도 자기의 의견을 떳떳하게 밝힐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학교도 잘못을 감추는데 급급하던 구태에서 벗어나 모든 구성원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학교운영위원회 등을 통해 다양하게 의견을 수렴하고 포용한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유가 교직원들 탓이라고 원망한다면 굳이 변명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며 몇 가지 느낀 점이 있다. 귀여워하는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 가서 담임교사에게 위세를 부리는 것은 지식인의 행동으로 적절치 않다. 잘못의 경중을 떠나 ‘조용히 인정하고 사표 내라’는 학부모들의 주장에 따라야 할 만큼 교권이 추락하면 정상적인 교육은 이뤄지지 않는다. 혹 대화에 이견이 있었다면 밤늦게 담임교사의 집에 찾아가 감정의 벽을 쌓기 전에 정당한 방법으로 건의하는 게 우선이어야 한다.
언론에서 한 작태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정말 요즘 몇몇 언론에서 하고 있는 일을 보면 북치고 장고치고 혼자서 다한다. 왜 그뿐인가? 이번 사건을 보면 병 주고 약까지 준다.
2명의 기자가 교실에까지 들어가 어린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좋으냐? 뺨을 때렸느냐?”를 질문하고, 민원을 제기한 측에서 취재 내용에 대해 보도하지 말 것을 요청했음에도 보도를 한 것은 언론의 사명인 공익은 뒷전이고 교육을 무시하면서까지 사익 챙기기에 급급하고 있다는 증거다.
취재내용을 보도한 SBS의 지역방송인 청주방송(CJB)이 19일 뒤늦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급식을 빨리 먹일 수밖에 없는 현행 급식체계와 교권추락의 문제점을 다뤘지만 은근슬쩍 자신들의 잘못을 덮는 우리나라 언론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았다. 한국교총 등 교원단체의 적극적인 대처에 ‘이번 건을 정당한 절차와 방법으로 제기하지 못해 사건을 확대시킨데 대해 반성하며 해당 선생님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는 요지의 사과문을 발표한 학부모들보다 오히려 측은하게 보였다.
어느 학교나 급식이 골칫거리다. 시간 조절을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니 자리가 한정되어 있는 좁은 급식소에 아이들이 몰리기도 한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아이들이 빨리 먹고 자리를 비워달라고 독촉하기도 한다. 급식소를 크게 지으면 해결될 문제지만 국가에서 교육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있어 요원한 얘기다.
여러 가지 음식을 골고루 먹여야 하니 때에 따라서는 급식종사원들의 손을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식단도 있다. 그런 날은 배식이 원활하지 않아 급식이 더디기도 하다. 급식종사원을 많이 고용하면 금방 해결될 일이지만 그만큼 급식비가 인상되어야 한다. 현재도 급식비 미납자가 많아 어려움이 많은 현실에서 어느 것 하나 쉽게 해결될 게 없다.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게 학교 급식이다. 그래서 더 이해를 필요로 한다. ‘교원 예우에 관한 규정’에 임의 조항으로 되어 있는 학교교육분쟁조정위원회를 상설화하여 교육활동과 관련된 분쟁이 발생할 경우, 일방적인 물리력이 아니라 제도와 시스템에 의해 해결하는 방안도 강구되어야 한다. 하지만 서로 이해하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에게는 슬픈 노래도 나쁘다고 한다. 괜히 김세환이 부른 ‘슬픈 노래는 싫어요’를 중얼거려본 하루였다. ‘슬픈 노래는 싫어요.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요.’ 그래도 우리 주변에는 훌륭한 학부모님들이 더 많아 힘이 난다. 작년 가을에 있었던 아름다운 사연 하나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To. 존경하는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여러모로 신경써주시고 애써주신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하고 철없는 우리 민욱이에게 관심 가져 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어제 일은 잘 해결됐어요. 보배 어머니께서도 안심하고 가셨어요. 개구쟁이들과 함께 하시다보면 보람과 어려움도 있으시죠. 애쓰시는 선생님을 잊지 않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빕니다.
10월 15일
안민욱 엄마 드림
그날 우리 반에는 작은 사고가 있었다. 체육 전담 시간에 농구시합을 했고, 시합과정에 신체 접촉이 있었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수업이 끝나고 교실로 오는 과정에 다툼이 벌어졌다. 여기까지는 아이들 세계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고 교실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던 나에게 전해진 소식은 그렇지 않았다. 맞은 민욱이의 이가 부러졌다는 것이다. 순간 긴장을 하며 민욱이가 있다는 보건실로 향했다. 그때 민욱이 어머니에게 걸려온 전화마저 통화불량으로 중간에 끊어져 궁금증을 더했다.
민욱이를 만나보니 앞 이의 끝 부분이 아주 조금 깨져 있었다. 아이들에게 들었던 내용보다 깨진 부분이 적었고 이가 시리지 않다고 해 다행이었지만 사고가 일어난 경위를 조사하며 영구치라는 걸 걱정했다. 회사에 있는 민욱이 엄마에게 전화로 진상에 대해 알려주고 하교하면 앞 이를 자세히 본 후 판단해 달라는 얘기도 했다.
어떤 사고든 뒤처리가 중요하다. 서로 감정이 상하지 않으면 일은 쉽게 풀린다. 다같이 아이들을 키우는 학부모님들이지만 보배 엄마가 먼저 전화를 하는 게 순서일 듯 싶었다. 보배 엄마에게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전화로 자세히 알려줬다.
엄마가 민욱이를 만나 상태를 확인했다고 생각돼 전화를 했다. 하지만 민욱이는 아직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보배 엄마가 찾아와 걱정하다 갔다는 것이다. 얼마 후 아이를 보니 그나마 다행이고, 다시 찾아온 보배 엄마를 아이들 일로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돌려보냈다는 민욱이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그날 나는 며칠 전의 퇴근 시간을 떠올렸다. 운전 중에 전화를 받았는데 우리 반 자모였다. **가 자기 집 아이를 괴롭힌다는 하소연이 길게 이어졌다. 말끝에 **의 집에 찾아가려고 하니 전화번호를 가르쳐달란다. 나도 잘 알고 있는 일이라 수시로 지도 중이었고 일부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어 전후 사정을 얘기했지만 감정이 격한 상태라 뜻이 전달되지 않았다. 또 그런 상태에서 전화번호를 가르쳐 줄 수도 없었다.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테지만 아직은 미완성인 게 아이들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일어날 일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내 자식이나 남 자식이나 다 똑같은 자식이다. 남 자식이 저지른 일 내 자식도 저지를 수 있다.
제몫 챙기기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양보할 줄도 알아야 세상살이가 재미있다. 어떤 일이든 이해하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고 세상이 아름다워진다. 어려운 일을 슬기롭게 해결해 준 민욱이와 보배 엄마 같이 훌륭한 학부모님들이 많다면 분명 교사들은 행복할 것이다. 교사가 행복하면 아이들이 즐거운 것 당연한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