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휴지의 부활

2007.03.07 09:04:00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분리수거하는 날이 목요일이다. 2월 달에는 다른 달 보다 이사를 가고 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양의 쓰레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사 가고 오는 사람들이 내 놓는 생활쓰레기와 그리고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어 내 놓는 각종 학습지와 문제집, 그리고 도서류가 엄청나게 많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는 내가 공부하였던 책들을 버리지 않고 오래도록 간직하고 다녔다.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이끌어준 고마운 책을 함부로 버리는 것은 죄악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 수 년을 끌고 다니다가 결국은 버리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문제는 실내공간이 좁고 지저분하다는 명분아래 쓸 만한 책들을 버리는 것을 보면 책보다는 편안한 공간을 취택하는 현 세태에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너무나 버리기에 아까운 책이 폐휴지로 쏟아져 나가게 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그래서 며칠 전 쓰레기 분리수거 하는 날 아파트 여기저기에 깨끗하고 쓸 만한 책들이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학교로 가지고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만 두었다. 지난번에도 만화책과 동화책을 보건실에 갖다 주었는데, 보건실에 환자로 온 아이들이 무료한 시간에 책을 즐겨 읽으며 무척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무거운 도서를 나 혼자 옮기기에는 만만치 않았고 귀찮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그놈의 체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기도 하였다.

저녁 무렵에 분리수거차가 아파트에 도착하여 커다란 집게 같은 큰 기계로 무지막지하게 책을 집어서 수거함으로 굉음소리를 내 뱉으면서 쏟아 붓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냥 쓰 잘데 없는 폐휴지로 실어 가는 것이다.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다시 보아 두었던 책이 있는 곳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아직도 도서박스에 책은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머뭇거리다가 아파트 경비원한테 내가 저 책을 가지고 가면 안 되겠느냐며 물어 보았더니 얼굴이 뚫어져라 쳐다본다, 나는 무안해서 학교에 근무하는데, 아이들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가지고 가고 싶다고 하였더니, 자기 형님도 학교에 근무한다며 흔쾌히 가지고 가라고 한다.

주섬주섬 모아서 들어보니 혼자서는 도저히 들을 수가 없다. 경비원과 함께 낑낑거리며 들고 일어서는데, 멀리서 보고 있던 수집상 아주머니가 험상궂은 얼굴로 다가오더니 왜 책을 가지고 가느냐며 항의를 한다. 우리가 아파트입주자 대표와 계약을 하여 수거를 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책을 다 가지고 가서 헌책방에 팔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며 따져 묻는다. 내가 개인적으로 쓰자는 것이 아니고 학교 학생들한테 도움을 주려고 가지고 간다고 하였으나 별로 내키지 않는지 얼굴이 퉁퉁 부은 모습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쓸 만한 물건을 함부로 버릴 정도로 그렇게 여유 있는 생활이 되었는지 모른다. 읽을 만한 책뿐만 아니라, 쓸 만한 물건들이 분리수거 시에 나오는 것을 보면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저 많은 물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전국적으로 버려지는 물건들은 엄청난 양이며, 처리하는 비용도 만만찮을 것이다. 지난해 동남아시아 여행을 할 때 아이들이 반바지만 걸치고 해맑게 웃으며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은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고 때콩하게 들어간 눈망울만 반짝일 뿐이었다. 그리고는 흙탕물에 가축과 함께 나뒹굴며,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 갑자기 그 아이들이 생각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너무 호사스럽게 사는 것은 아닌지?

더욱 걱정이 되는 것은 자신에게 소중한 지식을 깨닫게 해준 책을 소홀이 다룬다는 점이다. 한 때는 장식용으로 책을 읽지 않아도 진열장에 멋지게 진열하여 전시용으로 과시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이 일반화 되면서 책은 우리로부터 자꾸만 멀어지게 되었고, 책을 읽기 싫어한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대학입시에 논술이 당락을 좌우한다 하여 논술쓰기가 교육계 화두로 떠오르는 작금에 독서가 밑받침이 일진데, 독서는 하지 않고 논술 쓰는 기술을 익힌다고 하는 세상이고 보니 할 말을 잊는다. 어찌하여 책의 운명이 고작 한낮 쓰레기나 폐휴지로 우습게 보는 풍토를 가지게 되었는지 2월은 을씨년스러운 날씨만큼 더욱 마음까지 시려워 진다.

그러나 보건실에서 무료하게 쉬고 있는 아이들이 책을 펼쳐들고 즐거워하며 누워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결코 을씨년스런 일만은 아닐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제 아이들이 새 학년이 되어 희망과 꿈을 안고 힘찬 아이들의 생동감 넘치는 발걸음으로 내딛는 3월이 되면, 보건실에 책꽂이를 준비하여 책을 항상 가까이 두고 책을 즐겨 읽을 아이들을 생각하며 폐휴지 책의 부활에 미소를 지어본다.
최수룡 수필가/한국초등수석교사회 고문/아이신나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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