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사건에 대해 말하는 사람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예리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한편 있다. 1998년에 세상을 떠난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羅生門)이 바로 그 작품인데, 이 영화는 1950년도에 개봉한 흑백영화다. 이 영화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참고로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나오키 상과 아쿠타가와 상이 있는데 전자는 대중적인 소설에 후자는 예술적인 소설에 더 비중을 둔다고 하는데 후자는 그를 기려 만든 예술상임) 소설을 극화한 영화다.
주요 내용을 보면,
어느 부부가 길을 가다가 도적을 만나 남편은 살해당하고 아내는 겁탈당한, 어찌 보면 사실관계가 아주 단순한 강도 살인과 강간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도적의 입장에서, 아내의 입장에서, 무당의 입을 빌은 죽은 남편의 입장에서, 그리고 숨어서 사건을 지켜본 나무꾼의 입장에서 사건을 재구성하여 서로 너무나 다른 네 편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영화 제일 앞부분을 보면 라쇼몽이라는 허름한 절터에서 비를 그으며 세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데 "알 수 없어. 정말 이해할 수 없어'"라는 독백을 하는데 이 말이 어쩌면 이 영화가 얘기하고 싶어 하는 알맹이인 것 같다.
영화 속에서는 일본 교토 지방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도둑이라는 타지오마루라는 자가 여자를 겁탈하고 남편을 죽인 후 관아에 끌려와서 앞의 사실은 인정하지만 진실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칼싸움도 제대로 못하는 허풍쟁이이자 겁쟁이로 또 다른 겁쟁이인 여인의 남편과의 싸움에서 죽을 뻔 하다 겨우 살아난다. 타지오마루는 도적으로서의 자신의 자존심만이라도 지키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 타지오마루는 죽은 남자 부인의 강인함을 강조했지만, 여인은 자기의 약함을 눈물로써 호소한다.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한 남편은 자기가 몸을 버렸다고 평생 처음 보는 냉랭한 눈으로 쳐다보았고, 여인은 남편에게 자기를 죽여줄 것을 호소한다. 그 여인은 결국 남편을 죽이고 자살하려 했으나 자살에 실패했다고 울면서 말한다. 하지만 무당의 입을 통해서 죽은 남편은 아내를 비난한다. 아내가 도적 타지오마루에게 자기를 데리고 가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타지오마루와 달아나다가 멈춰 선 아내는 도적에게 남편을 죽이고 가자고 말했고, 도적은 그 말에 놀란다. 타지오마루는 여인을 쓰러뜨리고 발로 밟고는 남편에게 이 여자를 죽일까 살릴까 묻는다. 때마침 여자가 달아나자 타지오마루는 여자를 쫓아갔다가 몇 시간 뒤 돌아와 남편을 풀어주었는데, 도둑이 떠난 뒤 남편은 배신감 때문에 자살했다고 증언한다. 사건의 직접 당사자가 아니어서 객관적 입장이라 할 수 있는 나무꾼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역시 사건의 현장에서 진주가 박힌 값비싼 단검을 훔쳐갔으니까.
반쯤 부서진 건물에 랴쇼몽이란 현판이 걸린 큰 문 아래에서 비를 그으면서 어느 누구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임을 보고 승려는 이런 인간사의 모습이 전쟁이나 지진, 화재나 역병보다 훨씬 더 무섭다고 탄식한다.
"약한 것이 인간이기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야."라고 하면서.
요즘 신문의 사회면을 보다보면 웬만한 사건사고에는 무감각해진다. 그 보다 더 큰 것들이 워낙 많기에 그럴 것이다. 사회적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연계된 사건 몇 가지만 보자.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정아 사건부터 국세청장 뇌물수수 연루 의혹과 야당 대통령 후보의 BBK 의혹까지 뭐가 뭔지 모를 정도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법무팀장을 했었던 변호사가 구속을 각오하고 차명계좌에 숨겨둔 비자금을 폭로한 사건도 있다. 연세대 총장 부인의 편입학 대가 2억 수수사건은 또 어떤가?
그런데 이 사건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도층 비리를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해당 당사자들 모두 하나같이 그 혐의 사실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물론 몇몇 사건들은 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지 않았으므로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겠지만 명백한 증거가 상당수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아니올 시다로 일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것 또한 개인의 도덕성 파탄이라고 볼 것인가, 아니면 나약한 인간이기에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