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다.
남아메리카의 아마존강이나 오리노코 강에는 육식어종으로 알려진 피라니아가 서식한다고 한다. ‘피라니아’란 말은 원주민의 말로 ‘이빨이 있는 물고기’라는 뜻으로 몸길이 30cm 정도 크기로 달걀모양으로 생겼으며 눈에 띄게 옆으로 납작한 고기라고 한다. 이 고기는 성질이 사나운데다가 삼각형의 예리한 이빨을 가지고 있어 물고기는 물론이고 무리를 지어 강을 건너는 소나 말까지 공격하여 먹어치우는 사나운 물고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처럼 사나운 피라니아를 대형 수조에 넣고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하였다고 한다. 이 피라니아가 먹이를 받아먹기 위하여 수조의 한쪽으로 몰렸을 때, 수조의 한가운데를 투명한 유리판으로 막아버린 것이다. 먹을 것을 받아먹고 반대쪽으로 헤엄쳐 가려던 피라니아는 투명한 유리판에 부딪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성질이 급하고 사나운 피라니아는 화가 나서 몇 번이고 돌진하여 반대편으로 가려고 시도하였지만 번번이 고통만을 얻게 되자. 마침내는 반쪽 작은 공간에 갇혀 그 상황에 적응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몇 주일이 지난 후 수조 가운데의 유리판을 치워버렸지만 수조 안에 있는 피라니아는 이미 예전의 피라니아가 아니었다. 수조의 가운데쯤까지 기세 좋게 나갔다가는 스스로 어느 순간에 “여기가 끝이야, 이젠 더 이상 갈 수 없어”라고 중얼거리면서 번번히 되돌아오고 말더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피라니아가 반복된 구속 기제를 통하여 마침내는 자기 스스로 일정한 틀에 갇히고 만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 교육이 이런 식으로 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이 학습과정에 체험하는 여러 번의 실패와 절망감이 우리 아이들을 저 수조에 있는 피라니아처럼 반쪽 공간에 가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몇 번의 부정적 상황에 스스로 순응해 버려 이 피라니아처럼 좌절하고 있다면 정말로 큰 불행이 아닐까.
세계 최초로 샴 쌍둥이 분리 수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벤 카슨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어린 시절 흑인 빈민가에서 말썽꾸러기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이처럼 훌륭한 의사가 되기까지에는 그의 어머니 소냐 카슨의 든든한 지원과 믿음이 있었다. 벤 카슨이 싸움을 하거나 도둑질을 해도 그의 어머니 소냐 카슨은 잘못을 지적하거나 비난하기에 앞서 늘 사랑과 격려로 감싸주고 ‘꿈과 희망’이라는 주문을 한없이 불어넣었다고 한다.
만약 그의 어머니 소냐 카슨이 그 아들을 나쁜 놈으로 치부해 버리고 내버려두었다면 벤 카슨에게서는 어떤 희망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끝까지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희망으로 생각한 그녀의 위대한 사랑이 훌륭한 의사 벤 카슨을 만들어 낸 것이다.
며칠만 지나면 3월 새학기가 시작된다. 말썽꾸러기 우리 아이들은 또 선생님의 속을 태우고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수조의 한쪽 끝으로 몰아넣고 그들에게 스스로 ‘안 된다’ 또는 ‘나는 아니야’를 학습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을 보듬어주어 그들 스스로 위대한 사랑을 깨달으면서 넓은 바다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일본인들이 많이 기른 관상어 중에 ‘고이’라는 잉어가 있다고 한다. 이 고기는 작은 어항에 넣어 두면 8cm 정도밖에 자라지 않지만 큰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두면 약 20cm 정도까지 자란다고 한다. 그리고 강물에 방류하면 120cm의 대형 잉어가 된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암시한 바와 같이 우리 교사는 우리 아이들이 큰 무대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꿈과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울러, 앞의 피라니아 이야기에서 보이듯 사소한 잘못 때문에 그들을 일정한 틀로 가두는 일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 큰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마음과 지혜를 모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