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모인가? 음모인가?
어떤 이는 역모라고 하고 어떤 이는 음모라고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실체는 미로의 실타래도 아닌 깊은 미궁 속에 갇혀 신음하고 있다.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10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기축옥사’의 주인공인 정여립를 두고 한 말이다.
정여립.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1589년 그는 역모 죄로 죽임을 당했다. 자살했다는 말도 있고 살해당한 뒤 자살로 위장했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그는 조선 최대의 역적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기록은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 하나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옥사가 끝나고 호남은 반역의 땅으로 지목되었다. 그리고 연좌제로 인해 호남의 사림은 몰락했다. 호남의 인물은 모두 정여립과 눈길만 스쳤다는 고변만 있어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 눈물을 흘린 것을 두고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죄목을 쐬어 죽이기도 했다. 단순히 이웃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집단 죽임을 당했다. 조선은 피의 광풍이 몰아쳤고, 죄 없는 수많은 선비와 백성들이 죽임을 당했다.
비밀장계 한 장과 기축옥사 그리고 피바람
1589년 음력 10월 2일, 한 장의 장계가 조정에 당도한다. 황해감사 한준으로부터다. 그의 장계에는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는 고변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날 밤 조정은 비상이 걸렸고 조정에서는 황해도와 전라도에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급파했다. 피바람의 기운이 은밀하게 피어올랐다.
역모의 진위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보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건이 크게 확대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선조마저 “내가 여립의 위인을 아는데, 어찌 역적에 이르렀을까?” 혼잣말로 중얼거릴 만큼 모반을 믿지 않았다.
정여립과 같은 동인 사람들은 여립이 한양에 올라와 무고함을 밝히면 사건은 해결될 거라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건은 엉뚱하게 빗나가고 있었다. 정여립이 도주했다는 급보가 올라왔고 10월 8일 여립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전갈이 올라왔다. 진안 죽도에서다.
정여립의 자살 소식은 그가 모반을 했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이로 인해 기축옥사는 시작되었고 다음해 7월까지 1000여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조선조 4대 사화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숫자였다. 역모죄에 걸리면 삼족을 멸한다는 불문율처럼 그와 관계되는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했다.
그리고 정여립의 시신은 능지처참되었고 조산팔도에 버려졌다. 그의 집은 역모의 기운을 없앤다며 연못으로 만들어버렸다. 호남은 역도의 반향이 되었고 정여립은 근래에 이르기까지 역모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나 기축옥사와 관련된 대부분의 인물들은 사면복권 되었다. 오직 유일하게 정여립만이 역도의 늪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승자에 의해 패자는 철저히 부정되고 패악시 된다. 정여립도 그렇다. 진실은 감춰진 채 그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꺼낼 수가 없었다. 400여 년이 흐른 근래에 이르기 까지 말이다.
루소가 말했다. ‘역사란 많은 거짓말 중에서 진실과 가장 비슷한 거짓말을 골라내는 기술이다.’라고. 그런데 아직까지 정여립에 관한 진실과 가까운 거짓말은 찾지 못한 머리칼처럼 미궁 속을 떠돌고 있다.
보통 우리가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역사도 알고 보면 가장무도회 같은 것이 많다. 어쩌면 그 가장무도회 같은 역사 속에 정여립도 포함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동인과 서인의 당쟁의 희생물로 정여립이 선택되었는지 모른다. 또 이발, 정개청 같은 1000여 명의 인물도.
정여립이 죽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기축옥사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여립이 죽고 150여 년이 흐른 후 남하정은 <동소만록>에서 ‘기축옥사는 송익필이 뒤에서 조종하고 정철이 이를 성사시켰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당시 정여립은 서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었다. 정여립은 서인인 이이의 추천으로 홍문관 수찬까지 올랐다. 이이는 정여립을 “호남에서 학문하는 사람 중에 정여립이 최고다.” 할 정도로 정여립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이가 죽고 난 뒤 여립은 동인이 됐고 스승인 이이를 배신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선조 또한 정여립을 미워했다. 이에 정여립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다.
낙향 후 죽도 정여립은 대동계를 만든다. 대동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대동계는 사농공상을 따지지도 않았고 빈부의 차이를 따지지도 않았다. 정여립의 대동은 차별이 없었다. 평등의 세계였다. 누구나 대동계에 가입할 수 있었다. 이들은 매 달 보름에 회합하여 글도 배우고, 칼과 창 쓰는 법을 배웠다. 말을 타고 활을 쏘기도 했다. 인근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흠모했다. 나중에 그를 역모를 했다는 변고를 올린 해서지방에선 호남 전주에 성인이 나타나 백성을 구제할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을 정도로 그의 명성은 높아만 갔다.
그렇다면 정여립은 어떤 인물인가? 그가 어떤 인물인가를 알기 위해선 그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그는 공화론자이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임금 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는 없으며, 누구든 섬기면 임금이 아니겠는가.”
왕권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시대에 이런 혁명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생각 자체가 일종의 반역이고 역모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가 군사를 일으켜 역성혁명을 꾀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가 대동계를 조직하여 군사들을 훈련시키기는 했지만 이미 관에서도 알고 있었다. 또 나라에 위급한 상황이 오면 정여립에게 청하여 왜적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가 군사를 일으켜 역성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은 나 잡아가라 하는 소리밖에 안 된다. 따라서 이 말엔 정여립이 섬겨야 할 대상으로 임금이 아니라 백성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너진 대동의 꿈과 죽도
진안의 죽도. 여립은 이곳에서 대동의 꿈을 키웠다. 그리고 대동의 꿈을 접었다.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정여립은 역모가 발각되자 죽도로 도망을 쳤고, 진안 현감 민인백이 그를 생포하려 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되어 있다. 그의 자살은 그의 역모 인정이 되었고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동사만록>엔 전혀 다른 말이 쓰여 있다. “정여립이 진안 죽도로 단풍 구경을 갔는데 선전관과 진안현감이 죽인 후 자결한 것으로 꾸몄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기록 중 어떤 게 사실인지 지금 알 수는 없다. 다만 수많은 대동계원을 이끈 정여립이 한 번 저항다운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죽도로 도망치고 자살을 했다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음은 그의 죽음이 단순한 죽음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에 음모의 냄새가 난다고 한 것이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고 외쳤던 정여립. 그에 대해 역사학자인 이이화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정여립은 전도된 가치를 바로잡고 불평등과 차별의 세상을 뜯어고치고자 온몸으로 현실에 부딪쳤다. 그는 진보적 지식인이었고, 선진적 사상가였으며, 민중에 토대를 둔 개혁가였다.”
조선 천재 1000여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400여 년 전의 사건을 새롭게 조명하고 재구성한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의 저자인 황토현문화연구소 신정일 소장의 말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정여립의 사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정여립이 꿈꾼 대동사회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다. 설명하면 천하는 가문의 사물이 아니고 만민의 공물이라는 뜻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만든 대동계가 훗날 역모사건의 매우 불리한 증거로 작용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렇다고 기록도 없다. 하지만 그가 꿈꾸었던 대동사회, 불평등과 차별을 없애고 만민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염원은 지금 어디에선가 봄에 움트는 싹처럼 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