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선, 왠지 우울한 듯한 표정, 청색의 모자 아래로 걸쳐진 투명한 안경. 시인 강상기의 사진을 오랫동안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곤 이내 호기심이 사라진 유치원생처럼 시집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며칠을 그렇게 강상기 시인은 내 관심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서글픈 고집스러움이 묻어 있는 옹다문 입술을 다시 찾아 시집을 펼쳐들었다. 시집 속의 첫 시편이 눈에 들어온다. 단 한 줄로 된 시다.
"나는 세상의 굴절된 모습을 곱게 태우고 있다."
- '돋보기 장난' 모두
왜 그는 이 한 줄의 시편을 첫 페이지에 올려놓았을까. 그에게 세상의 굴절된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왜 그는 지금 그 굴절된 세상을 곱게 태운다고 말하고 있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의 지난 시간을 들춰보았다.
그는 '오송회'라는 간첩단 사건에 연류되어 구속이 되었다. 1년 2월을 옥살이 하고 1999년 복직되기까지 17년이란 세월을 교직을 떠나 야인으로 지냈다. 그 오랜 세월동안 그는 먹고살기 위해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시간의 늪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지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현실에서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럼 그가 17년이란 세월을 장외에서 살게 했던 '오송회'란 사건이란 무엇인가. '오송회'이란 이광웅 선생을 비롯하여 마음이 통하는 교사들이 학교 뒷산에 있는 소나무(다섯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해서 '오송회'라 했다 함) 아래 모여 토론도 하고 4·19혁명을 기리는 모임을 가졌는데, 이 모임이 간첩단 사건으로 둔갑되어 많은 교사들이 옥살이를 하고 교직을 떠났다.
이때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된 이광웅 선생(92년 작고)은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질곡의 세상과 작별을 해야만 했다. 난 그가 세상과 작별했다는 소식을 영등포의 한 커피숍에서 들었었다. 그날 친구와 함께 난 소주잔을 들이키며 이광웅 선생을 떠올려 봤다. 여리고 작은 그의 몸과 미소를. 지금 그는 갔지만 금강 하구에 있다는 조촐한 시비엔 이런 시 하나가 적혀 있다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에서
참된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참된 술꾼이 되고, 참된 연애를 하고, 좋은 선생이 되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작지만 큰 목소리로 외치는 이광웅 선생. 그와 함께 좋은 선생이 되기 위해 함께 했던 강상기 시인. 그는 세상살이의 모순을 이렇게 읊조리고 있다.
"그 녀석은 자본주의를 싫어한다면서 자본을 제일 필요로 한다 통일운동 재정을 마련하고자 일일 술장사를 한다 대학로 '싸스꿔치' 맥주타운에서 십만 원짜리 티켓을 팔아 토요일 오후 실컷 퍼 마시기 하필이면 술을 파느냐? 나는 티켓만 사고 술은 마시지 않는다 그 술을 마시면 안 되지 더구나 세계에서 가장 술 잘 마신다는 제정신을 잃은 혼미한 녀석들이 가장 많은 나라에서, 내가 술 마시면 안 되지 그러면서 나는 술주정을 한다 한반도의 흐린 하늘을 답답해 하면서"
- '모순1' 모두
한반도의 흐린 하늘이 어찌 시인만의 생각일까. 그 답답한 마음이 어찌 혼자만의 마음일까. 남과 북의 답답하고도 안타까운 현실을 지금 모든 국민이 바라보고 있는데. 수많은 선량하고 순수한 백성들이 한 마음의 촛불을 들고 국민의 마음을 전하지만 모르쇠로 일관하고, 오히려 옥에 가둔다고 으름장대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 어찌 술주정을 어느 누가 안 하고 싶을까.
시집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시를 읽다보면 짧은 시들이 많이 나온다. 두 줄, 세 줄로 된 시들, 그렇다고 시인의 마음이, 생각이 짧은 건 아니다. 복잡하고 힘들고 굴절된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갈한 영혼만은 간직하려는 시인의 몸짓, 마음짓들이 순한 언어 속에 강렬히 빛난다. 조금은 단조로움을 주는 듯한 그의 시편들에서 세상에 대한 서글픔도 묻어남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