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그리워지는 날

2008.09.24 09:34:00

일요일. 아침을 먹고 난 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읽지 못했던 책을 읽을 요량으로 침대에 누웠다. 대략 30분이 지났을까? 며칠째 계속 이어지는 늦더위에 방안이 후덥지근하여 더는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그제야 조금 시원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삼매경에 빠졌다.
 
그런데 이 분위기를 깬 것은 아파트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동네 아이들의 괴성이었다. 아이들은 가정과 학교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듯 소리를 질러가며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이들의 대화였다.
 
아이들이 내뱉는 열 마디 중 거의 두 마디는 듣기에도 거북한 욕을 포함하고 있었다. 더욱이 아이들은 서로 뒤지지 않으려고 목소리 톤을 높이기까지 했다. 욕하는 데는 남녀 구분이 없었다. 오히려 여자 아이가 욕을 더 잘하는 듯했다. 
 
처음에는 잠시 놀다가 집으로 들어가겠거니 생각하고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놀이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더군다나 소음도 더 커져갔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아이들에게 잔소리할 생각으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놀이터에는 초등학교 남녀 아이들 여러 명이 짝을 지어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의 시선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말끝마다 욕을 하며 목청이 터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위에 어른들이 있었지만 누구 하나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파트 노인정에서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노인이 나오더니 아이들을 보며 꾸중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노인 또한 아이들의 욕지거리가 못마땅했는지 혀를 차며 말을 했다.
 
"이 놈들아! 좀 조용히 못 하겠니? 그리고 무슨 욕을 그렇게 해?"
 
아이들은 마치 노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낄낄대며 웃었다. 아이들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주민 한 명이 아이들의 그런 행동에 야단을 치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이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듯 슬그머니 놀이터를 빠져나갔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노인은 큰 소리로 말을 했다.
 
"요즘 젊은 것들, 아이들 저런 모습을 보고도 모른 체만 하니 큰일이 아닐 수 없어.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세상 참 말세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 노인이 대신해 준 것 같아 내심 속이 후련해지기도 했으나 한편으로 교사로서 양심이 찔렸다. 노인의 말은 구태여 누구를 빗대어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심 아이들의 그릇된 행동을 보고도 수수방관하는 요즘 신세대 부모의 그릇된 가치관에 경종을 울리는 말이라 생각했다.
 
한편으로 오로지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자식사랑에 일침을 주는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 노인은 작년에 정년 퇴임한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가을에는 '천고마비', '독서의 계절'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가을이 왔음을 느끼지 못하는 탓일까. 아파트 벤치에 앉아 책 읽는 아이들을 찾아보기가 거의 어렵다. 어쩌면 이것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방법을 아이들에게 먼저 가르친 탓이 아닐는지.
 
요즘 들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책 읽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왜일까? 이 가을, 아이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준다는 명목으로 게임기를 사주는 것 대신 양서(良書)를 통해 자신을 수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어떨는지. 내일 퇴근길에는 서점에 들러 우리 아이에게 줄 책 한 권을 사야겠다.
김환희 강릉문성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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