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마을의 볼거리와 억새 많은 전주천

2009.03.03 10:26:00

청주의 도심을 가로지르는 무심천을 살리기 위해 2007년부터 시민과 전문가들이 한마음으로 무심천의 생태계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시청의 담당부서에서도 모니터링 결과를 바탕으로 무심천의 수질개선에 앞장서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에서 유영을 하고 있는 물고기와 먹이를 찾아 날아온 철새무리들이 자주 눈에 띈다,

수질환경 보존에 앞장서고 있는 시민단체 회원들이 안양예술공원과 안양천, 수원천과 수원화성을 돌아본데 이어 2월 22일에는 생태계를 성공적으로 복원시키며 자연형 하천으로 거듭난 전주천을 살펴봤다. 전주에 가기 전, 전주시청홈페이지(http://www.jeonju.go.kr)에서 전주라는 지명의 유래를 알아봤다.

〈전주(全州)의 옛 지명은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백제시대에는 완산이라 하였는데 마한국명으로는 원지국에 이른다. 전주라는 지명 사용은 서기 757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경덕왕16년부터이다.

전주 완산의 비명 원의를 볼 때 "완(完)"과 "전(全)"은 모두 "온전하다"는 "온"이란 우리말 뜻을 지닌 글자이다. 따라서 "완"은 그 음도 "온"의 근사음으로서 "완"이란 글자는 "온"이란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진기를 들고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우산을 챙겨준다. 8시 20분경 청주시청에서 전주로 향할 때는 흐리기만 했는데 창밖으로 보니 빗방울이 굵어진다. 이러니 나이 먹으면 자연스럽게 아내의 소중함을 깨우치는가보다.

차안에서 있은 자기소개 시간에는 자녀와 함께 참석한 여자 분이 지난 여름 무심천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을 보며 무심천의 수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았다.

전통문화센터의 주차장에서 내리니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오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글이 벽에 걸개그림으로 걸려있다.

바로 아래에 있는 전주천으로 내려가 어도부터 구경했다. 어도 옆에 평소에는 풍부한 수량을 확보하여 시민들이 휴식할 수 있는 수변 공간을 마련하고, 홍수가 발생하면 고무보가 자동적으로 넘어져 재해를 예방하는 한벽보가 있다.



한벽교 밑을 지나니 바로 옆에 한벽당(유형문화재 제15호) 정자가 있다. 한벽당은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조선 초기의 문신 최담이 별장으로 지은 누각이다. 수면위로 떨어지는 빗방울과 먼 산을 감싼 안개가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옛사람들은 이곳 절벽에 부딪치면서 하얀 포말을 이루는 장관을 한벽청연이라하여 전주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어느 곳이든 물가에는 정자가 있어야 풍경이 아름답다.



다시 자연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전주천의 물길을 따라 남천교까지 걸었다. 천변의 억새들이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어 가을철이면 억새의 장관을 보려고 일부러 찾아온다는 말을 실감한다. 어느 도시든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녹색환경도시를 조성해야 한다. 아파트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하류에 섶다리를 놓았다는 전주천에 답이 있다.

청주는 흐리다는데 전주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어린 학생부터 어른까지 40여 명이 우산을 쓰거나 급히 구입한 우비를 입고 길게 늘어서 돌다리를 건너는 풍경이 새롭다. 청주의 무심천도 이렇게 돌다리가 놓여지면 좋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궂은 날씨와 빗방울 때문에 을씨년스러웠지만 봄단장을 마친 버들강아지가 냇가에서 반겼다.

생물이 거의 살 수 없던 4∼5급수의 전주천이 수달과 원앙이 보금자리를 튼 1급수가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하천 담당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을 것이다. 평소 수질을 오염시키지 않는 시민들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한옥마을로 향했다.



80년이 넘은 전통 속에 맛과 멋이 어우러지는 한옥마을은 전주한옥마을 홈페이지(http://hanok.jeonju.go.kr)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인 것이다.〉



한옥마을에서 처음 찾은 풍남문(보물 제308호)은 조선중기의 건축물로 옛 전주읍성의 남문이다. 읍성은 지방행정의 중심지를 둘러쌓았던 성이다. 풍남문을 둘러보며 도시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일제에 의해 허물어진 청주읍성을 아쉬워한다. 풍남문에 대해 문화재청 홈페이지(http://www.cha.go.kr) 문화유산정보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옛 전주읍성의 남쪽문으로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10년(1734)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 불렀다. '풍남문(豊南門)'이라는 이름은 영조 43년(1767) 화재로 불탄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영조 44년(1768) 다시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순종 때 도시계획으로 성곽과 성문이 철거되면서 풍남문도 많은 손상을 입었는데 지금 있는 문은 1978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보수공사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한옥마을 입구에 천주교도의 순교터에 세운 전동성당(사적 제288호)이 있다. 전동성당은 처형지인 풍남문 성벽을 헐어 낸 돌로 주춧돌을 세워 1914년에 준공되었다. 붉은 벽돌 건물로 둥근 천장과 종탑의 곡선미를 살린 호남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이 건국되고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세워진 경기전(사적 제339호)은 전동성당 앞쪽에 있다. 아래의 글은 경기전에 대해 문화재청 홈페이지(http://www.cha.go.kr) 문화유산정보에 소개된 내용이다.

〈태종은 1410년 전주ㆍ경주ㆍ평양에 태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모시고 어용전이라 하였다. 그 후 태종 12년(1412)에 태조 진전이라 부르다가 세종 24년(1442)에 와서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흥전으로 달리 이름을 지었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고쳐지었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ㆍ헌ㆍ익랑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둘렀다.〉

누구든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하마비(下馬碑)가 정문 밖 도로가에 서있는데 모습이 특이하다. '이곳에 이르면 신분이나 계급의 높고 낮음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려야하고, 잡인들은 출입을 하지 말라'는 뜻을 지닌 '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 비에 새겨있다.



경기전에서 가까운 곳에 혼불 작가 최명희 문학관이 있다. 문학관의 독락재(獨樂齋)라는 당호는 최명희 선생의 일생이 이상적 경지에서 혼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독락(獨樂)과 닮아 지어졌다. 당호에 담긴 의미가 협소한 전시장을 여유를 누리며 천천히 둘러보게 한다. 문학관을 나오는데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갑니다.'라는 글귀가 자꾸 눈에 밟힌다. 문학관 홈페이지(http://www.jjhee.com/korean/2006/main.html)에서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문학세계를 알아볼 수 있다.



은행로를 거쳐 향교길로 가면 전주 한옥의 대표적 건물인 학인당(민속자료 제8호)이 있다. 학인당은 효자로 이름났던 백낙중의 옛 집이다. 조선 고종 때 영릉참봉을 지낸 인재 백낙중을 기리기 위해 대문에 '백낙중지려(白樂中之閭)'라고 쓴 현판을 걸었고, 집 이름은 호에서 인(忍)자를 따 '학인당(學忍堂)'이라 지었다고 한다. 조선말의 상류층 주택으로 조선왕조 붕괴 후 궁중 건축양식이 민간주택에 도입된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차를 마시고 숙박을 하며 옛집에서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다.



향교는 유학을 가르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지방에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전주향교(사적 제379호)의 배치형태는 훌륭한 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7호)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무와 서무, 대성전뒷담을 사이로 명륜당, 서쪽으로 장서각ㆍ계성사ㆍ양사재ㆍ사마재ㆍ교직사, 정면에 일월문과 만화루가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에 있는 고목들이 향교의 풍경을 고즈넉하게 만든다.



오목대와 이목대(전북기념물 제16호)는 조선시대 왕실과 관련된 유적지이다. 오목대와 이목대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정비가 잘된 오목대와 달리 이목대는 폐허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http://www.cha.go.kr) 문화유산정보에서 오목대와 이목대에 관해 알아볼 수 있다.

〈오목대는 후에 조선을 세운 이성계 장군이 당시 군사를 이끌고 잠시 쉬어가던 장소이다. 고종이 직접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 (太祖高皇帝駐畢遺址)"라는 비문을 새겨 놓은 비는 광무 4년(1900)에 세운 것이다.

이목대는 태조의 5대조인 목조 이안사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으로, 고종이 직접 쓴 비문을 통해 조선 왕조의 시조인 이안사가 이곳에 살았었음을 알게 되었다.〉



시민공원으로 불리는 덕진공원은 후백제 시대 견훤이 인공적으로 만들었다는 덕진호 일대의 유원지이다. 호반을 가로지르는 현수교의 풍경이 아름다운데 현수교를 경계로 한쪽은 보트장, 반대편은 연꽃자생지이다. 특히 여름철에는 화사한 연꽃이 호수를 뒤덮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겨울철이라 연꽃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곳곳에 서있는 시비와 조각품을 감상하며 달랬다.

전주는 청주와 공통점이 많은 도시이다. 그런데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전주와 달리 청주는 읍성을 비롯해 역사를 증명할 옛것들이 모두 사라졌다. 답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역사와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교통안내]
1. 호남고속도로 전주IC - 반월교차로 우회전 - 조촌교차로 좌회전(시청,완주군청 방향) - 27번 국도 - 금암광장 좌회전(남원,시청방향) - 태조로 방향으로 우회전 - 한옥마을 관광안내소
2. 익산포항고속도로 완주IC - IC 앞 사거리 우회전 - 차량등록소 앞에서 좌회전(남원,진안방향) - 호성네거리 우회전(완주군청 방향) - 명주골사거리 직진 -안골사거리 직진 - 성황2길 우회전 - 태조로 방향으로 우회전 - 한옥마을 관광안내소
변종만 상당초등학교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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