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마네의 연인 올랭피아>를 읽고

2009.03.30 17:50:00


"마네의 연인, 올랭피아"의 원제는 "Mademoiselle Victorine".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온 ‘워낭소리’가 소설 같은 영화라면 나는 이 책을 영화 같은 소설이라 규정하고 싶다. 19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그 위에 마네와 그의 뮤즈인 모델 주인공의 이야기를 오버랩 시킨 이야기로 봐도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훨씬 전에 명화 속 이야기5 화가와 모델(이주헌 2003, 예담출판사)을 흥미 있게 읽은 적이 있고 책 내용 전부 요약해 두었다가 한참 후에 나의 가족 홈페이지에 탑재하였더니 현재 클릭 수가 282회에 달한다. 거기에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요약했었다.

마네(Edouard Manet 1832-1883)-빅토린 <발칙한 도발>

신화나 전설에 기대지 않고 살아있는 시대의 이미지로 누드를 그리려고 했다. 마네의 뜻대로 자신을 날것으로 드러내놓았지만 빅토린은 외설, 음란, 창부, 걸레 따위의 손가락질은 아랑곳하지 않았던 듯하다. 세상에 대해 다소 냉소적이었다. 그녀는 현대적이고 개성적인 마네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작품 : 바티뇰 街의 아틀리에, 앵무새와 여인등.)

19세기 프랑스미술전시회 관람 중 마네가 그린 빅토린의 초상화 한 점을 보고 소설 ‘올랭피아’를 기획했다는 저자 데브라 피너맨의 영감과 상상력은 화려한 실내 장식, 여인의 옷차림을 그려내는 치밀한 표현에 이어지고, 저자의 미술적 열정과 예술적 자질은 소설 속 상황 전개를 통해 영화 장면처럼 실감나게 묘사한 부분에서도 작가적 능력이 보인다.

마네가 가장 좋아하는 모델이자 그의 작품 속 다양한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빅토린. 그녀의 평범함 속에 숨은 단호하면서 냉정한 모습은 마네가 바라는 최상의 모델 조건이다. 모델로서의 인내심, 대중적인 매력, 새로운 연애관, 활기와 자유분방함 같은 그녀만의 자질은 바로 ‘풀밭 위의 점심’, ‘올랭피아’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작가는 당시 유명한 버지니아 드 카스티글리온 백작 부인과 마네의 모델 빅토린 뫼랑 두 여인을 모델로 했다고 하는데 이런 부류의 여자들은 등급으로 구분할 수 있단다. 코르티잔, 로레트, 그리고 흔히 말하는 창녀.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의자에 깔린 시트는 열려있는 여성의 질을 흉내 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겨져…/ 그가 자신을 침대에 내려놓자 그녀가 주도권을 잡고 전설적인 마담 굴뤼로부터 배운 성적 기교를 그에게 베풀었다/ 높은 천장과 금박을 입힌…장식한 이 웅장한 침실에서 왕관을 쓰지 않은 황제는 그냥 작고 왜소한 남자처럼 보였다/ “내 여동생의 첫 아이는 너무 늦게 낳아서 나왔을 때 턱수염을 달고 나왔다니까요!“ 와 같은 풍자적이거나 익살스런 문장도 눈에 띈다.

서양미술사를 배경으로 마네와 빅토린 둘의 ‘춘화도’ 같은 사랑 엿보기를 기대하겠지만 주인공과 마네의 관계보다는 오히려 당시의 파리 사교계의 위선과 타락에 초점을 둔 이 이야기는 빅토린이 마네의 모델이 되는데 그녀를 본 마네는 그녀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녀를 모델로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을 그린다. 작품 ‘올랭피아’에 대한 소설 속에서 마네가 말하는 대사는 이렇다.

"다음 번 전시회에 낼 그림을 생각하면서 영감을 찾고 있다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떠올랐어요. 내가 현대적인 비너스를 그린다면 어떨까?…/ 아무도 여태까지 그런 시도를 해본 적 없어…/ '당신들은 내게 다가와 비난을 퍼붓는 와중에도 날 간절히 원하고 있어"/ "당신이 위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이죠?"/ "황제에서 부르주아 은행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

그런데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 끊임없이 전개되는 작품 속 풍광이나 실내 분위기 묘사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와서 나는 종종 ‘이 소설은 허구입니다.…실제 인물, 사건, 장소와 닮은 점은 모두 우연의 일치입니다.’라는 글귀를 반복해서 기억해야만 했다. 소설에 나타나는 모네, 피사로, 세잔처럼 화가나 루이 나폴레옹, 외제니 왕후, 조세핀 왕후, 윌렌스키 공주, 루이 파스퇴르, 오스만 남작, 마틸드 보나파르트 공주 같은 인명은 소설 속 설정이란 뜻이다. ‘펀치넬로’, ‘페르골라’, 압생트 같은 술 이름, ‘카라라 대리석’… 등 어려운 단어들은 본문 아래에 별도로 주를 달아 놓았기에 한층 더 극적인 사실감을 주고 있다.

여신과 같은 포즈로 누워있는 주인공 실물 모습의 작품이 살롱에 전시되자 갖은 욕을 다 먹게 되는데 자칫 나락으로 떨어질 뻔한 그녀를 구해주는 이는 당시 황제의 최측근이자 실력자인 리옹 공작. 그는 작품 속 그녀를 보는 순간 이 여인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기로 작정했고, 소문이 퍼지자 그녀에게 쏟아졌던 비난은 사라지고 그녀는 뭇 남성의 시선을 받는 스타가 되어 최고급 가옥과 최신식 유행의상으로 차린 사교계의 귀인으로 변한다. 마네와 주인공과의 스캔들은 사실 책에서는 바람 잘 날 없는 측면이 좀 강조되긴 해도 대체로 특별한 장면은 흐려지는 스크린 효과처럼 상상 속에 맡겨진다.

우리나라도 장 모 탤런트 자살사건 스캔들에 대한 수사가 끝 모르고 이어지고 있지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부일처의 단단한 관계가 지켜진 건 거의 없다. 황제부터 귀족들과 평민에 이르기까지 공공연하게 성적인 로맨스나 부적절한 관계는 있어왔고 이 소설에서도 특히 이러한 사회상이 낱낱이 파헤쳐지게 된다.

마네가 작품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위선은 책 속에 그대로 나타나는데 ‘올랭피아’라는 그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점점 그 범위를 확대하여 급기야 나폴레옹 3세와 외제니 왕후, 독일의 비스마르크까지 총 동원되어서 보불전쟁이 일어났던 파리까지 전개된다.

보잘 것 없던 오페라단의 발레 소녀가 사교계를 평정하고 황제와 귀족들까지 품을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오르는가 하면 결국 정치적 야심을 위해 주인공을 이용하려던 한 실력자의 위험한 거래가 커다란 사건을 만들어내지만 탐정소설 같이 전개되던 이야기는 해프닝처럼 해결된다.

1장에서 30장까지 각 장마다 맨 앞에 슬로건처럼 <삶에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단 하나의 행복만 있다>등의 특별하고 짧은 글들을 앞세워 다음에 펼쳐질 내용을 암시한다. 소설과 관련된 마네의 그림들을 스틸 사진처럼 끼워 넣은 것은 멋진 아이디어지만 좀 더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려면 줄거리 전개에 따라 적절히 여러 점을 군데군데 배치했으면 더 효과적이겠다.

읽는 중에 ‘그’와 ‘그녀’가 얼마나 반복되는지 어떤 때에는 ‘가만있자. 이 곳의 그녀는 아까 그녀가 아니구나. 누구이지?’하고 헷갈릴 때도 있었고 p.135, 194, 265, 326에서 교정이 필요한 ‘옥에 티’를 발견한 것은 나의 과잉 리뷰 탓이다.
이장희 안심중학교 정년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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