쫌 있으면 살구를 따 먹을 수 있겠네

2009.04.09 21:16:00

교정 한 쪽에 서있는 살구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마른 꽃잎만을 매달고 있습니다. 며칠 전, 꽃눈만 껌벅이던 것들이 꽃을 활짝 피어 아침 등굣길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몇 몇 아이들도 꽃을 감상하며 ‘넘 예뻐요.’ ‘쫌 있으면 살구를 따 먹을 수 있겠네. 히히.’ 하며 종알거리며 지나갑니다.

교정 앞에 외롭게 오래도록 서있는 이 살구나무는 아이들의 요깃거립니다. 성질 급한 어떤 아이들은 노랗게 익기도 전에 나무를 올라타서 따먹습니다. 치마 입은 여학생들이지만 선머슴마냥 행동합니다. 살구를 한 주먹 따선 자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인심을 쓰기도 합니다.

요즘 학생들에게 학교는 운치가 없는 공간입니다. 점심시간이면 교정을 걸으며 히히덕거리기도 하고 음악을 듣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점심 먹기도 바쁩니다.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듯 아침 일찍 등교해서 밤늦게까지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다시 학원으로 독서실로 가는 모습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오래되고 빛바랜 살구나무에서 핀 살구꽃은 작은 위안을 줍니다. 꽃뿐만이 아닙니다. 열매는 즐거운 입맛과 함께 나무 타는 놀이도 함께 줍니다. 밑에서 받쳐주고 위에서 상큼한 살구를 따는 아이들의 모습, 상상만 해도 즐겁습니다.

사실 과일 중에서 살구는 친밀한 과일은 아닙니다. 잠시 때를 놓치면 맛도 못보고 지나치고 맙니다. 그렇지만 옛날에는 대추·복숭아·자두·밤과 함께 ‘5과’에 속해 귀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살구나무는 대추나무만큼이나 사람과 가까이 하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예전 시골 집집마다엔 살구나무를 심어 한두 그루정도 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엔 살구나무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살구꽃도 보기가 쉽지 않고요. 예전에 살구나무를 많이 심은 이유는 단순히 꽃이 예뻐서만은 아닙니다. ‘살구나무 숲이 있는 곳에는 염병이 돌지 않는다.’는 말처럼 살구나무는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한방에선 살구씨를 행인(杏仁)이라 부르는데 천식이나 기관지염, 인후염, 종기 등을 치료하는데 쓰인다 합니다. 민간요법에서도 요긴하게 사용하기도 하고요. 개고기를 먹고 체했을 때 살구씨 달인 물을 먹으면 체기가 내려가 살구씨를 달여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체한 것이 내려갔다고 합니다. 과일 나무 하나에도 선인들의 지혜가 담겨있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살구꽃 하면 생각나는 게 이호우 님의 “살구꽃 핀 마을”이라는 시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 배웠던 시입니다. 2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살구꽃을 볼 때마다 이 시가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고등학교 때 국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의 독특한 표정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아이들에게 그 “살구꽃 핀 마을”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이따금 이 시를 읽을 땐 그때의 선생님이 생각나곤 합니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집을 들어서면은 반겨아니 맞으리.

바람없는 밤을 꽃 그늘에 달이 오면
술익는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이순을 바라보던 선생님은 목소리가 걸걸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시를 읽을 때면 새색시마냥 눈을 감고 읽곤 했습니다. 물론 모든 시를 그렇게 읽은 건 아니지만 “살구꽃 핀 마을”을 읽을 땐 유독 눈을 감은 것 같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모습과 표정이 웃겨 우리들은 키득거렸지만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 선생님은 그 시를 읽어주며 어릴적 고향 마을의 살구꽃을 생각하거나 그 살구꽃나무 아래에서 막걸리 한 잔 들켰던 누군가를 떠올렸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살구꽃의 운명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공사로 인해 곧 뽑혀 나가거나 잘릴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도 나이를 먹어 다른 적당한 곳에 옮겨갈 처지도 못됩니다. 어쩌면 올해가 저 살구꽃을 볼 마지막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틈이 날 때마다 자꾸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꽃을 화사하게 피운 살구나무는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방글방글 웃으며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봄 햇살이 그저 반갑다는 듯 말입니다.
김 현 교사
ⓒ 한국교육신문 www.hangyo.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 문의 : 02) 570-5341~2 광고 문의: sigmund@tobeunicorn.kr ,TEL 042-824-9139, FAX : 042-824-9140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 등록번호 : 서울 아04243 | 등록일(발행일) : 2016. 11. 29 | 발행인 : 문태혁 | 편집인 : 문태혁 | 주소 : 서울 서초구 태봉로 114 | 창간일 : 1961년 5월 15일 | 전화번호 : 02-570-5500 | 사업자등록번호 : 229-82-00096 | 통신판매번호 : 2006-08876 한국교육신문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