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곳의 사찰에 깃든 풍물과 역사 에세이 <길 위의 절>

2009.12.29 09:13:00


절집은 늘 고즈넉하다. 특히 낙엽이 지는 무렵이면 그 고즈넉함은 쓸쓸함과 함께 묻어온다. 이따금 고즈넉한 고요함을 깨주는 건 처마 밑에 달려있는 풍경소리와 몇몇 관광객들의 목소리이다.

종교는 다르지만 조용하면서 살아있는 절집마당을 걷는 걸 난 좋아한다. 이따금 바람 따라 뎅그렁거리며 들려오는 풍경소릴 듣고 있노라면 마음의 때들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러나 산속에서, 산 아래에서, 길옆에서 산을 오르내리는 길손들의 짧은 쉼터가 되어주기도 하는 절집에 많은 사연들이 담겨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늘 평온한 시절을 보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풍경과 모양에 취해 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많은 절집들은 역사적 아픔은 물론 다양한 사연들을 가슴에 묻어두고 서있음을 알 수 있다.

임꺽정의 숨결이 아직도 살아있는 안성 칠장사



역사는 반복된다. 500년 전에 일었던 일들이, 100년 전에도 일어날 수 있고 현세에도 일어날 수 있다. 500년 전의 임꺽정은 전봉준이 되었고, 성격은 다르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되었다. 그렇게 역사는 사람의 마음이 바르게 서지 않는 한 흘러가면서 반복된다.

임꺽정은 양주의 백정 출신 아들이다. 그는 도둑이다. 그러나 그는 도둑질을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게 아니었다. 그는 부자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하고 헐벗은 빈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일종의 활빈이었다.

임꺽정이 부자들의 재물을 탈취해 가렴주구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눠주게 된 것은 병해(昞海) 대사 때문이다. 칠장사에 생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 임꺽정은 병해 대사를 만난 순간 감화돼 일생동안 대사를 스승으로 모셨다 한다.

임꺽정과 병해 대사의 만남은 꺽정이 단순한 도적에서 의적으로 전환되는 분기점이 되었다. 대사를 만나고서부터 꺽정은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기 전까지 빈민을 위한 의적 생활을 하고 나라를 훔치고자 했다. 그런 임꺽정의 흔적이 지금도 임꺽정과 여섯 명의 심복들이 깍아 만든 목불 '꺽정불'로 남아 있다. 이 꺽정불은 임꺽정이 병해 대사와 상봉하려 칠장사에 들렀다가 달포 전에 세상을 뜻 것을 알고 대사를 기리기 위해 만든 목불이다.

임꺽정 외에도 칠장사는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가 열 살 무렵까지 활을 배우고 무술을 익혔던 곳이다. 이래저래 칠장사는 혼란한 나라를 훔치고 새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 뜻을 키웠던 곳이기도 하다.

성 안의 절, 교룡산성의 선국사

남원에는 교룡산성이 있고 그 옆에 만인의총이 있다. 선국사는 산성 안에 있는 절이다. 절이 성 안에 있다 해서 성이 부처님을 지키고자 한 것은 아니다. 절은 그저 전쟁시 적의 동태를 살피는 망루로 사용됐다. 그리고 성을 지키는 본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동학혁명 때에는 혁명군의 은신처로 이용되기도 했다. 실제로 동학혁명의 지도자인 김개남은 남원성을 점령하고 이 교룡산성을 중심으로 활약하며 관군과 싸웠다. 이곳엔 지금도 '김개남 동학농민군 주둔지'라는 작은 푯말이 있어 당시 농민군들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산성 내 선국사엔 하늘색으로 된 쇠북이 있다. 이 쇠북이 평시엔 땅 위에 사는 것들의 평안과 행복을 비는 법고로 이용되었지만, 전시엔 희생을 독촉하는 전고(戰鼓)로 사용되었다 한다.

"선국사 주변은 죽고 죽이는 역사로 물들었다. 성벽의 거칠고 단단한 돌들은 불교의 자비와 무관해 보인다."

장영섭의 글과 사진이 어울린 <길 위의 절>은 사찰에 관한 기록이고 에세이다. 글쓴이는 전국의 42곳의 사찰을 여행하며 그곳의 풍물은 물론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단순한 사찰 이야기로 흐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책을 읽다보면 절과 절이 있는 지역의 자연과 풍물, 그리고 역사의 아픔과 흔적들이 고스란히 베어난다. 따라서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우리가 늘상 다니던 절도 다시 보게 되는 마음을 준다.

김 현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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