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말과 행동
언어란 정보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약속이나 규칙 등의 집합이라면, 말은 사람의 생각을 목구멍을 통하여 조직적으로 나타내는 소리이다. 말싸움이 많으면 분쟁이 일어나고, 분쟁이 잦은 곳에는 평화가 찾아들기 어렵다. 교사가 수업 시간에 표현하는 말은 일종의 언어에 가깝다. 그러기에 교사는 언어를 씀에 있어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고 무게가 있어야 한다. 즉시 학생들은 교사의 흉내를 동일시로 표현한다. 교실에서 학생들의 꼴불견을 보고 있노라면 성미급한 사람은 쓰러질 정도로 횟수를 따지면 수차례가 넘을 것이다. 참고 참아서 못 참을 때 참는 것이 인내라고 혹자는 이야기 하지만, 오늘의 학생들의 자태를 방관하는 자세로 일관하는 것은 교사의 본분의 위치가 아니다.
그러나 방관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을 위해서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것이 더 무서운 것이다. 현실을 나무라는 사람은 많다. 교실이 엉망진창이라고. 그러면서 정작 학생들의 사건사고가 교사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면 학교를 원망하고 교사를 채근한다. 교사가 그래서 되느냐고 학교가 무엇을 했느냐고 참으로 이중의 잣대를 대는 학부모들의 시선을 쉽게 읽어낼 수 있다. 그래도 교실에 들어서야만 행복이 찾아드는 것이 교사의 신분이다. 교실을 벗어나 한가하게 교무실에서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을 때 그저 무언의 공백을 메워가는 허탈감에 빠지기도 한다.
교사는 학생이 그리워질 때 행복한 것이고, 학생은 교사의 사랑을 받을 때 기쁨으로 넘쳐난다. 교실의 무게를 높이는 것도 학생과 교사가 해야 할 일이요. 교사의 무게를 드높이는 일도 교사와 학생이 노력할 때 더욱더 좋아지는 것이다. 아무리 학식이 높아도 학생들로부터 외면당하면 그것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높은 학식을 학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들과 호흡할 때 학식은 더욱 빛난다. 학교에서 교사의 한 마디는 가정에서 부모의 한 마디보다 더 침투력이 크다. 엄마가 이렇게 하라고 하면, 엄마에게 아이들은 선생님이 저렇게 하라고 했다고 맞장구를 칠 때가 많다. 그만큼 교사의 언어와 행동은 학생들의 내면의 깊이를 얼마나 심도있게 좌우하는 가를 이런 단순한 예에서도 일 수 있다.
자기의 잘못을 뒤돌아보는 것을 성찰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가르치는 교수-학습 방향을 뒤돌아보는 것은 창의적인 수업의 새 터전을 생각하는 것이다. 말을 잘하는 이는 자신이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말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알게 되고, 언어를 잘 이용하는 자는 언어의 조합을 통해 언어의 묘함을 더욱 깨닫게 되는 것과 같이, 교사는 경험의 축적으로 자신의 새 방향을 설정할 수도 있고, 학생의 미래를 예언할 수도 있다. 인문 과학은 경험의 축적이라고 했다. 많은 학습은 학습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두뇌에서 조합돼 언어로 표출되기에 교사의 언어와 행동은 학생의 언어와 행동의 거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