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도로 곳곳에 결빙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다행히 햇볕이 나고 기온이 오르며 얼음은 녹았지만 그래도 조심스러웠다. 추운 날씨에 체육관에서 기다릴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을 생각하니 마음은 조급했지만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약속 시간 5분 정도 남겨놓고 나서야 가까스로 교문(부여여중)에 들어섰다.
교장선생님을 찾아뵙기 위해 현관으로 길을 재촉했다. 쉬는 시간인지 아이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으며 낯선 손님에게도 깍듯하게 예의를 차려 인사를 했다. 고풍스런 감청색 교복에 밝은 표정 게다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 그것만으로도 아침부터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교장실로 가기 위해 잠시 두리번거리고 있었으나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물으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장선생님이었다.
교장선생님을 뵌 지 근 2년여 만이다. 예전 모습 그대로여서 더욱 마음이 편했다. 반갑게 수인사를 나누고 교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께서 안내한 곳은 교장실이 아니었다. 장학실이란 팻말이 붙어 있었는데, 아마도 회의를 할 때 사용하는 공간인 듯 싶었다. 오히려 교장실보다는 편하겠다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곳은 교장실이었다.
교직에 들어선 분들에게는 어쩌면 교장선생님은 누구나 한번쯤 듣고 싶은 호칭임에 분명하다. 물론 직책에 연연하지 않고 아이들 가르치는 데서 보람을 찾는 분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나이가 들면 큼지막한 팻말이 붙은 교장실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결재도 하고픈 심정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싶다.
교장은 ‘학교의 으뜸 직위’를 지칭하는 말이다. 위치가 곧 권력이라고 이해하면 자칫 권위적인 어감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장학이란 말은 ‘공부나 학문을 장려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직위나 직책보다는 교육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교장선생님께서 교장실 대신 장학실로 명칭을 바꾼 것만 봐도 학교의 리더가 어떤 역할을 해야할 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 싶어 마음 한 켠으로 작은 감동이 밀려왔다.
장학실은 현관에 들어서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고 문 옆에는 외부 손님을 위한 신발장이 놓여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문은 바깥 복도와 평평하게 처리해 문턱을 없앴다. 누구나 마음 편하게 들어와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한 마음 씀씀이를 읽을 수 있었다. 실제로 잠깐 동안이었지만 몇몇 선생님들이 자유롭게 장학실로 들어와 교장선생님과 편안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반가움은 잠시 접어두고 아이들 얘기로 돌아갔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기본에 충실합니다. 그래서 생활지도로 크게 고민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아이들 다루기가 갈수록 만만치 않은 현실을 감안하면 약간 과장되지 않았나 싶어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지만 워낙 확신에 찬 말씀이다보니 오히려 궁금증이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문제있는 아이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한 후 이를 토대로 부모님과 함께 일정 기간 동안 봉사활동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조취하고 이 과정을 마쳤을 때 학교가 개입하여 정상 생활을 돕는다는 것이다.
흔히 문제 학생의 뒤에는 문제 가정이 있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부모의 의지만으로 아이들을 지도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현실임을 감안하면 교장선생님의 의지는 더욱 훌륭해 보였다. 물론 문제 학생이 있으면 가정과 연계하기보다는 학교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더 쉽고 편안한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다보면 징계는 솜방망이에 그치고 문제 학생의 일탈은 악순환을 거듭하게 마련이다.
주말의 시작인 토요일 오전이고 전교생(639명)이 모인 자리인지라 강연이 쉽지 않을 듯 싶었다. 주제 또한 ‘자기 주도적 학습방법’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관심없는 학생들은 졸거나 딴짓할 개연성도 높았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했다. 여러 차례 강연을 해봤지만 많은 아이들이 이렇게 흐트러짐없이 연단을 주목하는 것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팔과 다리가 없는 닉부이치치 얘기를 동영상으로 편집하여 보여줄 때는 눈물을 글썽거리는 아이도 있었다. 작은 정보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메모장에 깨알처럼 받아적으며 연단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워보일 수가 없었다.
두 시간 가까운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른다. 다만 연단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에 매료되어 등에 땀이 흐를 정도로 분위기에 취한 기억밖에는 없다. 강의를 진행하는 내내 장학실에서 들었던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기본이 충실합니다.”라고. 그렇다. 기본이 된 아이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학교의 역할과 교사의 본질은 무엇일까? 정치 권력과 그 권력보다 더 높은 권력을 갖고 있다는 언론이 너도 나도 교사흔들기에 나서고 있는 요즘, 교단에 서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럽다. 그래서 괜히 주눅들고 움츠러들어 자괴감에 빠진 적도 있다. 그런데 부여여중에서 만난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오히려 자신감에 넘쳤다. 교장실을 장학실로 바꿔 소통의 폭을 넓히고 문제 학생은 외부 전문 기관의 도움을 받아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등 원칙과 소신을 갖고 교육활동에 임하는 모습을 보면서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