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형이지만 그 동안 전국 여행지를 참 많이 떠돌았다. 그러면서 느낀 게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면 여행지도 품격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3일 청주삼백리 회원들과 다녀온 충북 괴산군 칠성면의 산막이 옛길(http://sanmaki.goesan.go.kr)이 그런 곳이다. 흥덕구청 광장에서 일행들을 만난 후 1시간 30여분 거리의 산막이 옛길로 향했다. 바람은 차지만 날씨가 따뜻해 차창너머로 보이는 농촌의 일손이 바쁘다. 이른 시간이지만 할아버지 한 분이 밭에서 소로 쟁기질하는 모습도 보인다.
도착하니 입구의 비닐하우스에서 미선나무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한국의 특산식물 미선나무는 군락을 이룬 자생지 5곳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데 그중 3곳이 괴산군에 위치한다. 미선나무는 열매의 모습이 둥그스름한 부채를 닮고, 개나리를 닮은 흰색의 꽃이 은은하고 매혹적이어서 관상용이나 울타리용으로 인기가 높다.
꽃구경을 하고나니 발걸음이 가볍다. 옛길이 괴산호를 끼고 외사리 사오랑 마을에서 산골마을인 산막이 마을(산속의 마지막 마을)까지 이어지는데 숲속의 자연환경이 한국의 자연미를 그대로 보여주고, 전망대와 여러 가지 볼거리가 옛 정취와 향수를 느끼게 해줘 날씨 따뜻한 날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과 먹을거리 챙겨 하루 산책하기에 좋은 코스다.
산막이 옛길 안내도를 살펴보고 아래로 내려가면 선착장과의 갈림길에 새로 지은 화장실이 있다. '여기좀 봐유! 산막이 선착장까지 화장실이 없대유~ 이곳에서 버리고 가유~' 충청도 말은 '유~'가 길어 느리지만 상대방을 존중하는 겸손이 함께한다.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재미있는 문구 때문인지 사람들이 화장실 앞에 길게 줄을 섰다.
처음 만나는 곳이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마치 하나의 나무처럼 자라는 연리지와 큰 바위덩어리들이 놓여있는 고인돌 쉼터다. 연리지는 남녀 사이 혹은 부부애가 진한 것을 비유하는 사랑나무다. 연리지를 한 바퀴 돌아보며 사랑과 소망을 기원하는 사람도 있고, 하트 모양의 나무판에 사랑을 속삭인 글들도 걸려있다. 이곳의 연리지를 보며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고사목이 된 청천면 송면리의 소나무 연리지를 생각하니 은근이 부아가 치밀었다.
소나무동산에 오르면 시원스레 펼쳐진 괴산호의 풍광이 눈앞에 나타나 가슴이 확 트인다. 이곳에 그네와 그네벤치, 예쁜 우체통이 있어 맑은 공기를 마시며 낭만을 누리기에 좋다.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은 구름사다리를 닮은 소나무 출렁다리에 올라 스릴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번에 산막이 옛길을 찾은 주목적이 가을이면 전국 등반대회가 열리는 등잔봉에서 천장봉으로 이어진 등산로를 산책하고 한반도 전망대에서 괴산호를 내려다보는 것이라 노루샘과 연화담 못미처에서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등산로 초입이 하늘과 어우러진 모습이 백두산 천지를 오르는 풍경과 닮았다.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 칠성소재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등잔봉(해발 450m)은 높지 않은 산이지만 처음부터 오르막이 이어져 힘이 든다. 숨을 헐떡거리다 산허리에서 만난 이정표 '힘들고 위험한 길, 편안하고 완만한 길'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인생살이가 그렇듯 각자의 길에서 행복을 찾아내면 된다. 힘들고 위험한 길을 걸으며 또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은 내가 택한 인생살이다.
등잔봉 정상의 조망을 나뭇가지들이 가린다. 잡목 몇 개만 제거해도 호수의 멋진 풍광이 제대로 보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산을 오르며 가지 제거 작업을 한 잡목을 이용해 산책로를 개척 중인 사람들을 만났는데 등잔봉도 잡목을 이용해 전망대를 만들고 있다. 세계적으로 청정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뉴질랜드에서 놀이기구, 운동기구, 벤치 등이 모두 목재로 만들어진 것을 보며 감동했던 터라 자연을 이용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등잔봉부터 1.1㎞ 거리의 한반도 전망대까지는 나뭇가지 사이로 괴산호가 보이고 평탄한 산길이라 두런두런 이야기가 이어진다. 전망대에 도착해 한반도를 닮은 지형이 호수와 어우러진 모습과 괴산댐, 반대편 산 밑의 오지마을 갈은(갈론)구곡 가는 길을 바라봤다.
전망대에서 천장봉(437m)까지는 300여m 거리로 가깝다. 천장봉 못미처에는 진달래 동산으로, 지나서는 산막이 마을로 가는 갈림길이 있어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이곳에서 산막이 옛길로 향하지만 우리는 천장봉을 지나쳐 삼성봉(550m)까지 갔다. 평평하고 제법 넓어 쉼터로 알맞은 정상부분에 사랑나무 연리지가 있어 반갑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은 바람소리뿐 적막강산이지만 가끔은 이런 곳이 좋다.
삼성봉에서 내려오는 하산 길은 가파른데다 쌓여있는 낙엽이 미끄럼을 타게 해 엉덩방아 찧기 쉽다. 산 아래로 내려오면 임도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농원을 만난다. 물길을 내려다보며 걸으면 물에 막히기 전부터 오지의 유배지로 산막이 옛길의 끝인 산막이 마을이다.
이제 3가구만 남은 마을에 들어서면 노수신적소와 하얀 집이 눈에 띄는데 노수신적소(충북기념물 제74호)는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지낸 조선시대의 문신 노수신이 유배생활을 할 때 거처하던 곳으로 괴산댐을 만들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고, 하얀 집은 최근에 지어졌다. 이곳에서 맑은 공기도 마시고 포장마차에서 두부 안주로 막걸리도 한 잔 마시는 게 인생살이의 묘미다.
산막이 마을에서 옛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경치가 좋은 선착장이 있다. 5000원이면 이곳에서 배를 타고 초입의 선착장까지 갈 수 있다. 젊은이들이 그네를 타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선착장을 지나 흙길을 걸으면 가까운 거리부터 나무계단이 이어지고 아름다운 호수 옆으로 산딸기길, 가재연못, 진달래동산, 다래 숲 동굴, 마흔고개, 고공전망대, 괴음정, 호수전망대, 얼음 바람골, 앉은뱅이 약수, 망세루와 연화담, 노루샘을 차례로 만난다. 산막이 옛길은 때 묻지 않은 청정지역이고 여러 가지 볼거리들이 쪽빛 호수와 어우러져 산책길이 지루하지 않다.
산책로 주변에 군데군데 놓인 지게 위에서 이 고장 문인들의 작품을 만나는 것도 인상적이다. 가끔은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지기도 해 인생살이가 재미있다. 시 '이슬'을 직접 쓴 김경안 시인을 그의 작품 앞에서 만나 이곳이 임각수 괴산군수가 나뭇짐을 지고 다니던 길이라는 얘기까지 들었다. 괴산읍에서 감초식약동원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 시인은 괴산문협 회원들과 옛길로 나들이 나왔다가 마침 이곳을 지나는 중이었다.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회라지만 변주섭 괴산문협 지부장은 가까운 일가라 더 반가웠다.
산막이 옛길에서 두 곳의 나무줄기가 물을 내뿜는 앉은뱅이 약수에 사람들이 많다. 모터로 지하수를 퍼 올린 약수인지 물맛이 좋고 시원하다. 몇 번 다녀간 곳이지만 두 곳의 약수에 남녀가 있고 성을 구별해 먹어야 효험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가끔은 누군가가 만들어내 '믿거나 말거나'인 얘기가 머릿속에 진실로 각인된다. 싱거운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앉은뱅이 약수가 물을 내뿜는 모양을 유심히 관찰하니 세상 이치에 둔한 나도 남녀를 구별한다. 새로운 역사가 이렇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여행의 말미에서 새삼 실감했다.
역사가 늘 새로운 것을 우리 문화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듯 몸이 떠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며 느끼는 게 진정한 여행이다. 그런 면에서 산막이 옛길만큼 찾을 때마다 새롭고 마음 편한 곳도 드물다. 산새의 노랫소리와 봄꽃의 화려함이 밖으로 유혹하는 이 좋은 날 몸을 자연에 맡길 수 있는 산막이 옛길로 떠나보자. 그곳에 숨어있는 당신의 행복이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