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중복, 바른 거야 틀린 거야

2012.02.16 20:14:00

2012년 2월 12일 일요일 유재석, 박명수, 박미선, 신봉선이 진행하는 KBS 해피투게더 시즌 3 재방송을 봤다. 이번 주는 ‘KBS 라디오 DJ’ 특집으로 출연자는 홍진경, 유인나, 황정민, 전현무 등이었다. KBS 간판 라디오 DJ들이 방송 중에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는데, 황정민 아나운서는 후배 전현무 아나운서가 유인나의 전화번호를 얻어내 문자와 전화를 굉장히 많이 하더라고 폭로했다.

그러자 유인나는 전현무와 라디오 게스트로 처음 만나 대화를 하던 도중, 자신이 라디오와 집만 오가는 생활을 한다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전현무가 같이 좋은데 가겠냐고 제안했다고 한다. 유인나가 어디냐고 묻자 전현무가 인도네시아 밑에 브루나이라는 곳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에 다른 출연자들의 비난이 거세지자 전현무는 ‘같이 가자는 게 아니라 브루나이에 아는 지인이 있는데~’ 유인나가 놀러가고 싶으면 그 사람에게 잘 말해서 싸게 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의미였다고 해명했다.

전현무의 ‘아는 지인~’이라는 표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지인(知人)은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는~’이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날 전현무는 이렇게 말했지만, 자막은 ‘아는~’이 빠진 상태로 바르게 표현했다.

이러한 의미 중복은 정도의 차이일 뿐, 일반인과 아나운서의 구별이 없다. 지식인조차도 입말은 중복하고픈 유혹을 버리지 못한다. 아나운서도 의미를 반복해서 쓰듯, 우리 주변에는 이와 비슷한 표현을 하는 경우가 많다.

글말도 마찬가지다. ‘결실을 맺다, 미리 예고하다, 개인적인 사견, 기간 동안, 널리 보급하다, 둥근 원, 손을 놓은 채 수수방관하다, 맡은 바 소임, 떨어지는 낙엽, 함께 공존하다, 몸소 겪으며 체험하다, 같은 동포, 외갓집(혹은 처갓집), 몸보신하다, 방금 전, 옥상 위에서, 투고한 원고, 평소 때보다, 해변가, 따뜻한 온정, 월요일날, 낙화암 바위, 밖으로 표출하다, 어려운 난제, 허다하게 많다, 역전 앞, 소급해 올라가다, 누런 황금 들판, 지나는 과객, 차를 탄 승객, 돌이켜 회고해보건대, 공기를 환기하자, 겉보기에 멋진 외양, 완전히 근절하다, 다시 재고하다, 남은 여생, 말로 형언할 수 없다, 미리 예견하다, 박수를 치다, 보는 관점, 추풍령 고개, 한옥집, 호피 가죽, 수확을 거두다, 처음부터 초지일관하다, 푸른 창공, 고향을 찾은 귀성객, 미리 예상하다.’ 등이 그렇다.



문장에서 의미가 동일한 단어나 구절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반복을 피할 수 없거나 뜻을 강조하여 쓰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어구가 반복돼서 표현되면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다.

이런 이유는 우리가 한자를 빌려 써온 역사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고유어에 비해 한자어는 음절수가 적다. 한자어는 우리가 말해 놓고도 느낌이 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입말에서는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의미 전달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방안으로 한자어에 고유어를 덧붙여 쓰게 되었다. 예를 들어 낙엽은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대부분의 화자는 친숙한 고유어로 보충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다. 그러다보니 ‘떨어지는’을 덧붙여 말하게 된다.

학교 문법에서는 이를 두고 의미 중복이라고 하고, 비문으로 처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언중이 의미가 중복된 것임을 비교적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의미를 더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동어 반복이라는 방법을 동원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말에서 이러한 의미 중복 현상이 드물지 않게 나타나기도 하므로 사전에서 ‘-의 잘못’으로 명백하게 판정한 예가 아닌 경우에는 잘못으로 보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서 의미 중복이 옳다 그르다는 판단은 애매하다.

사실 모든 언어는 입말에서 잉여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 가진다. 특히 우리말에서 의미 중복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것은 과연 사회적으로 허용될 것이며 어느 정도까지 어느 수준에서 허용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이런 상황을 일부 선별해서 비문법적이거나 다른 이유로 잘못된 언어 습관이라고 교정을 강요하는 것은 무리한 판단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의미의 중복을 발생시키는 요인은 많다. 또, 발화의 경제성이나 언어사적 측면에서 볼 때도 의미의 중복은 단순한 오류로 판단하기 어렵다. 어차피 입말은 언중이 수많은 오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를 바르다 틀리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냥 한국어에 나타나는 현상 정도로 교육하는 것도 합리적 선택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우리 주변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오류를 생산한다는 것을 알았다. 의미 중복 현상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는 입말이 글말에 확산되는 현상으로 어떻게 보면 진정한 언문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길목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다. 아울러 무턱대고 한자를 배격하는 것도 깊게 생각해봐야 한다. 한자어는 싫든 좋든 우리가 품고 살아가야 할 언어이다.
윤재열 초지고 수석교사, 수필가
ⓒ 한국교육신문 www.hangyo.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 문의 : 02) 570-5341~2 광고 문의: sigmund@tobeunicorn.kr ,TEL 042-824-9139, FAX : 042-824-9140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 등록번호 : 서울 아04243 | 등록일(발행일) : 2016. 11. 29 | 발행인 : 문태혁 | 편집인 : 문태혁 | 주소 : 서울 서초구 태봉로 114 | 창간일 : 1961년 5월 15일 | 전화번호 : 02-570-5500 | 사업자등록번호 : 229-82-00096 | 통신판매번호 : 2006-08876 한국교육신문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