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는 또 다른 폭력

2012.07.23 13:49:00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4일 버지니아 방송 인터뷰에서 자신의 낙서 실력을 자랑했다는 보도다. 그는 자신이 중요 국제회의에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적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회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오바마 대통령은 2007년 상원의원 시절 자신의 낙서 그림을 환자 치료비용 마련을 위한 자선 경매에 출품한 적도 있다. 오바마 대통령 이전에 낙서를 잘한 대통령으로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꼽힌다. 레이건 대통령이 그린 낙서 그림은 옆에 앉아 있던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수십 년 동안 간직했다가 자신의 다른 기록문서와 함께 공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경우는 낙서의 주인공이 공개되었지만, 낙서는 역시 누가 했는지 알 수 없다. 즉 낙서는 대개 은밀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혹은 노출된 공간이라도 낙서는 익명성 보장이 필수다.

그러다보니 낙서의 공간은 화장실이 으뜸이다. 화장실은 비밀 공간으로 익명성이 보장된다. 내용도 자극적이고 직설적이며 상스러운 이야기도 많이 기록된다. 특히 성(性)과 관련된 것이 많은데, 글과 그림이 뒤엉켜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욕망이 표출된다.

그렇다고 화장실의 낙서가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80년대 대학가의 화장실에는 정치적 현실을 비판하는 낙서가 주종을 이루었다. 독재에 저항하는 영혼들이 화장실에서 정치 비판을 남겼다. 절대 권력을 비판하고 민중을 선동하는 글을 썼다. 이 시대 대학생들의 낙서는 화장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밖으로 나갔다. 벽보로 만들어져 보다 체계적이고 대담한 목소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숨겨진 낙서는 실정법 위반도 피해갈 수 있었지만, 벽보는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정권과 맞서 싸우기 위해 그 방법을 택한 것이다.



어린 시절 동네 담벼락은 으레 낙서가 있었다. 철없는 아이들이 유치한 표현과 욕설이 뒤섞여 있었다. 일부 내용은 개방된 벽에 담아놓기에는 민망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동네 사춘기 소년 소녀의 숨겨진 마음이 표현되기도 해서 모두의 관심거리로 올랐다. 어린 시절 낙서가 즉흥적이고 비논리적이라면 대학가의 낙서는 제법 그럴듯했다. 기발한 유머부터, 촌철살인의 경구, 아름다운 시 구절, 그리고 간혹 개똥철학도 볼 수 있다. 시대를 고민하고, 권력의 비리를 고발하는 낙서도 많았다. 간결한 언어로 세태를 신랄하게 꼬집는 글은 낙서를 넘어 서슬 시퍼런 경고 같았다.

낙서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낙서가 있다. 낙서는 비록 유치하고 서툰 내용이어서 깊이 있는 정보를 읽기 어렵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저 밑바닥 심리가 표현된다. 그 말이 생활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아도 인간들은 낙서를 통해 마음을 씻어낸다. 치졸한 말이라도 뱉어서 마음의 해방감을 누린다. 낙서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낙서라는 무의미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그 무엇을 배설할 수 있다.

낙서는 비단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인류 문화의 시원으로 잘 알려진 알타미르 동굴(the cave of Altamira) 벽화도 알고 보면 낙서로 남긴 것이다. 서양은 낙서가 아예 예술로 승화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벽이나 그 밖의 화면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이 그래피티라는 예술로서 등장했다. 그래피티 예술은 미국에서 꽃을 피웠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 때문에 뉴욕은 몸살을 알았다. 뉴욕의 지하철 낙서는 일부선 대중 예술이라고 했지만, 도시 미관을 해치는 주범이었다. 결국 추방 캠페인과 행정 당국의 단속으로 낙서를 사라지게 했다.

아예 낙서를 장려하는 곳도 있다. 일부 대학가 음식점은 낙서를 자랑처럼 늘어놓고 있다. 그곳은 젊은이들의 사랑과 행복, 때로는 절망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런 곳에 낙서는 당시 상황과 그리고 인품까지 기록되어 있어 감동이 더한다. 간혹 귀퉁이에 명품 낙서는 마음에 감동을 주기도 한다.

세상의 변화가 우리 삶의 모습을 바꾸듯, 최근 낙서 문화도 많이 바뀌고 있다. 지금은 학교의 화장실 환경이 바뀌면서 화장실 낙서가 사라졌다. 대신 책상이나 의자에 낙서가 많다. 그런데 이 낙서가 학교 폭력의 또 다른 유형이다. 주로 힘이 센 아이들은 약한 아이의 책상과 의자에 낙서를 하고 있다. 과거는 낙서 하는 자가 약자의 처지에서 항변의 몸부림이었다면 현재 교실 책상에 하는 낙서는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꼴이다. 교내에서 폭력은 신체적·언어적·정서적인 것 등 다양하다.

일부에서는 교실 내 책상과 의자에 하는 낙서에 대해 관대한 시각이 있다. 즉 청소년들이 자기표현 의지가 강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공공 기물에 개성을 표현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힘이 센 학생들이 약한 학생의 책상과 의자에 하는 낙서는 일종에 폭력이다. 약한 아이들은 항변도 못하고 당하고 있다. 낙서가 단순한 행위라고 치부하기 쉬운데 여기에도 힘의 차이가 있고, 약자에 대한 학대로 쉽게 발전할 요인이 있으니 원천적으로 봉쇄할 필요가 있다. 평상시 교실 내에서 공공 기물에 낙서를 하지 못하도록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
윤재열 초지고 수석교사, 수필가
ⓒ 한국교육신문 www.hangyo.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 문의 : 02) 570-5341~2 광고 문의: sigmund@tobeunicorn.kr ,TEL 042-824-9139, FAX : 042-824-9140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 등록번호 : 서울 아04243 | 등록일(발행일) : 2016. 11. 29 | 발행인 : 문태혁 | 편집인 : 문태혁 | 주소 : 서울 서초구 태봉로 114 | 창간일 : 1961년 5월 15일 | 전화번호 : 02-570-5500 | 사업자등록번호 : 229-82-00096 | 통신판매번호 : 2006-08876 한국교육신문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