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년을 한 왕조가 이끌어오고,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이 모두 남아 있는 유례가 드물다. 조선왕릉! 왕릉은 유교와 풍수 등 한국인의 세계관이 압축된 장묘문화 공간으로 문화적 가치가 높다.
용어와 뜻을 알고 조선왕릉을 돌아보면 더욱 즐거운 답사가 된다. 문화재청의 자료에 의하면 조선시대(1392-1910) 왕실과 관련되는 무덤은 ‘능(陵)’과 ‘원(園)’으로 구분된다. 왕릉으로 불리는 능(陵)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왕릉과 원은 강원도 영월의 장릉, 경기도 여주의 영릉과 녕릉 3기를 제외하고는 당시의 도읍지인 한양에서 40km 이내에 입지하고 있으며, 왕릉이 40기, 원이 13기, 총 53기가 있다. 조선시대의 27대 왕과 왕비, 사후에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 44기 중 40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0월 6일, 선정릉과 헌인릉을 돌아봤다. 물론 조선왕릉전시관(http://royaltombs.cha.go.kr)의 홈페이지를 통해 오랜만에 역사공부를 알차게 했다. 강남구 삼성동의 선정릉(사적 199호)은 9대 임금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인 선릉, 11대 임금 중종의 무덤인 정릉으로 세 개의 능이 있어 삼릉공원으로 불린다.
선릉은 같은 능호를 사용하는 두 개의 능이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된 동원이강릉이다. 선릉과 정릉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파헤쳐지고 재궁(왕이나 왕후의 관)이 전부 불타 세 능상 안에는 시신이 없고 보수하면서 새로 만들어 올린 의복만 묻혀있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와 세자빈 한씨(훗날 소혜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지 두 달이 되기 전에 아버지 의경세자가 20세로 요절해 할아버지인 세조가 궁중에서 키웠다. 세조의 뒤를 이은 숙부 예종이 즉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자 1469년 왕위를 계승했다. 1494년 38세에 승하하기까지 재위 25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왕비 공혜왕후 승하 후 숙의 윤씨를 계비로 삼았다가 행실을 문제 삼아 폐비 후 사약을 받게 하여 훗날 연산군 폭정의 계기가 되었다.
정현왕후 윤씨는 우의정 영원부원군 윤호의 딸로 훗날 중종이 되는 진성대군의 어머니이다. 1479년 연산군의 생모인 숙의 윤씨가 폐위되자 이듬해 왕비로 책봉되었다. 원자인 연산군을 친자식같이 키워 연산군이 성종의 묘지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 윤호를 윤기무로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고, 승지들로부터 윤기무와 폐비 윤씨에 대한 답변을 듣고서야 자신의 친어머니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정릉은 조선 11대 임금 중종의 능이다. 중종은 1506년에 연산군의 폭정에 대항하여 박원종, 성희안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에 의해 11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중종에게는 3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능인 선릉 옆에 홀로 묻혀 단릉 형식이다. 중종의 능을 이곳으로 옮기고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는 태릉에 묻혔다.
정릉에서 정문으로 나가다보면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숙식과 제사음식을 장만하는 재실과 수명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고, 조선 왕릉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왕궁역사문화관이 가까운 곳에 있다.
왕릉이 시내에 위치하지만 수명이 오래된 소나무들이 숲을 이룰 만큼 녹지공간이 넓다. 연인이나 가족과 나들이 나온 사람들, 쉼터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 산책로를 걸으며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서초구 내곡동의 헌인릉(사적 194호)은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릉인 헌릉, 23대 임금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합장묘인 인릉으로 헌릉은 안쪽에 있어 인릉과 산책길을 지나야 만난다.
인릉은 23대 임금 순조와 순원왕후를 같은 곳에 안장한 합장무덤이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재위기간 장인 김조순과 외가 사람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며 국정주도에 노력하였고, 효명세자(익종)에게 왕 대신 정사를 돌보는 대리청정을 시키며 안동김씨의 세도를 견제했으나 세자가 일찍 죽음으로써 실패하는 등 세도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재위 34년 중 19년에 걸쳐 수재가 일어나고 천재지변이 잇달아 발생하였다.
순원왕후는 전면에 나서 세도정치를 펼친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맏딸로 나이 어린 왕이 즉위해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국정을 대리로 처리하던 수렴청정을 10년에 걸쳐 두 번이나 하는 이례적인 정치적 발자취를 남겼고, 정치사와 국어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는 한글 편지를 여러 점 남겼다.
헌릉은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를 같은 곳에 무덤을 달리하여 안장한 쌍릉이다. 웅장한 규모로 조선 왕릉 중에 가장 크다고 전해진다. 죽어서도 부모 곁에 묻히기를 바랐던 세종의 효심이 왕릉 곳곳에 숨어 있다.
태종은 태조의 5남으로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신진정객들과 힘을 합해 구세력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계비 신덕왕후의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에 책봉되자 불만을 품고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과 함께 정도전, 세자 방석과 형 방번 등을 살해하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둘째 형인 방과(정종)가 2대 임금이 되게 했다. 2년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박포가 넷째 방간과 공모하여 일으킨 제2차 왕자의 난 평정으로 지위를 확고히 한 후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아 3대 임금이 되었다. 즉위 후에는 의정부, 삼군도총제부 설치 등 관제개혁과 국왕 직속의 근위대로서 역모를 방지하는 의금부 설치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때 인적자원을 관리하기 위해 호패법을 실시하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했다. 1418년 세자 세종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으로서 국정을 감독하였다.
원경왕후는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정도전을 먼저 공격하도록 하였고 무기를 숨겼다가 거사할 때 사용하게 하는 등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보위에 오른 태종이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후궁을 계속 늘리고 친정 남동생인 민무질, 민무구 형제가 사약을 받는 등의 불행을 겪었다.
헌릉의 문화유산해설사는 태종이 정적들을 죽이고 귀양 보내는 등 잘못이 많은 임금이지만 인간됨을 깊이 알아보면 본인이 악역을 맡으며 한글을 창제한 세종이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도록 울타리 역할을 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조선 왕릉 모두를 서삼릉 한 곳에 모으려 했고, 국회의사당을 종묘로 옮기려 했었던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옛날 얘기를 들려주며 능을 잘 보존해 후손에게 물려주려면 국민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말한다.
왕릉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가을 단풍이 왕릉 주변을 울긋불긋 아름답게 물들이고, 왕릉이 놀이터인 다람쥐와 청설모는 겨울 식량인 도토리를 주워 나르느라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