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에 두 발을 내딛는 게 울릉도 여행의 클라이맥스다. 그런데 기상 여건이 연중 45일 정도만 선박의 접안을 허락해 독도를 더 외로운 섬으로 만든다. 예전에 봤던 독도가 눈에 밟혀 3주 만에 또 울릉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바람이 심술을 부려 이번에도 독도에 가보지 못했지만 예정에 없던 추암의 촛대바위를 돌아보는 등 계획된 대로 이뤄지지 않는 여행을 통해 더 큰 인생살이를 배웠다.
815투어 회원들은 시간관념이 정확하다. 어쩌면 밤잠을 설쳐도 피곤하지 않을 만큼 여행에 대한 기대가 컸을 것이다. 지난 11월 3일, 약속시간에서 1분 늦은 오전 3시 31분 관광버스가 몽벨서청주점을 출발한다.
중부, 영동, 동해고속도로를 달려 동해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이 6시 30분이다. 전망대에 올라 서쪽 하늘 높은 곳에 떠있는 둥근 달과 짙은 구름 위를 붉게 물들인 동해의 일출을 바라본다. 동해시 등대회식당에서 물망치찌게로 아침을 먹고 묵호항여객선터미널에 도착해 항구의 아침풍경을 감상한다.
며칠째 바다 날씨가 나쁘다더니 8시 40분경 높은 파고로 출항이 2시간 연기되었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여행은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다. 연달아 독도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태연하다. 기분 좋게 집 떠난 여행지에서는 그냥 즐거워야 하는데 옆에서 노인들 몇이 먹을 것 때문에 싸워 안타깝다.
갑자기 주어진 2시간을 슬기롭게 활용하는 것도 여행자의 몫이다. 묵호항에서 차로 20여분 달려 일출시 바위 위로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이 장관인 추암의 촛대바위로 갔다.
동해시 추암 바닷가로 가면 바닷바람이 깎아낸 기이한 모습의 바위들이 늘어서 있다. 그중에서도 홀로 우뚝 솟은 촛대바위를 중심으로 기암괴석들이 동해바다와 어우러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조선시대 한명회는 이곳의 산과 바위들이 만든 절경을 미인의 걸음걸이에 비유하며 능파대라 이름 지었다. 전설에 의하면 촛대바위는 본처와 소실간의 투기로 하늘이 벼락을 내려 혼자 남은 남자의 형상이다.
전망대에 올라 송림과 남한산성의 정동방에 위치한 촛대바위 주변의 풍경을 구경하고 아래로 내려오면 고려 공민왕 때 삼척심씨의 시조 심동로가 낙향하여 건립한 정자 해암정(강원유형문화재 제63호)이 있다. 국내 유명 조각가 30여명의 작품이 전시된 추암조각공원과 역무원이 없는 추암역도 둘러본다.
묵호에서 울릉도까지는 161㎞, 울릉도에서 독도까지는 87.4㎞ 거리이다. 11시가 되자 동해시 묵호항과 울릉도 사동의 울릉신항, 울릉신항과 독도 구간을 운항하는 439톤급 씨플라워호가 묵호항을 출항한다.
〈수평선은 늘 그 자리에 있는데/ 그 아래에서 춤추는 파도가/ 항구에서는 큰 배/ 나약하고 초라하게 만들며/ 여객선 승객들 속 뒤집는다〉
먼 바다로 나가자 너울성 파도가 배를 공깃돌처럼 다뤄 블루스를 추듯 높은 파도에 리듬을 맞춘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배 멀미로 고생하자 여행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여기저기 누워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배 멀미 하지 않는 것도 복이라는 생각을 했다. 울릉도가 시야에 들어오고도 1시간을 더 달려 2시 35분경 사동의 울릉신항에 도착했다.
버스로 가두봉터널을 지나 통구미의 바다거북모텔(054-791-0303)에 짐을 풀었다. 바람이 독도 방문만 막은 게 아니다. 출항이 늦어지며 울릉도에서의 여행 일정도 배배꼬였다. 늦은 점심을 먹고 3시 20분부터 모텔 앞 거북바위부터 시간에 쫓기는 버스투어를 시작했다.
서면 소재지 남양과 구암마을, 버섯바위와 e자형 수충교를 지나 울릉도의 서쪽 끝 태하로 갔다. 태하황토굴을 구경하고 바위의 모양이 파도를 닮아 파도공원으로 불리는 해안산책로를 걸었다. 이번에도 울릉도의 성황당을 대표하는 성하신당과 태하등대 북쪽 언덕 대풍감에 올라 우리나라 10대 비경에 속하는 북면 해안의 멋진 풍경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굽잇길 언덕을 넘고 풍력발전기와 작은 연못을 지나 현포항 방파제로 간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코끼리바위, 송곳바위, 노인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물 위의 코끼리바위(공암)는 작은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이 보인다. 노인봉(높이 199m)은 전체가 암벽으로 이루어졌고, 노인의 주름살처럼 봉우리에 가로로 굵은 결이 있다.
차를 달려 성불사로 가면 앞을 가로막은 송곳바위(452m)가 하늘을 찌른다. 단일 암벽으로 국내에서 가장 높다는 송곳바위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도 신기하다. 북면소재지의 아담한 포구 천부항을 지나 나리분지관광지구로 간다. 너와집과 투막집을 구경하고 1박2일을 촬영했던 식당에서 삼나무나물무침을 안주로 씨껍데기술을 마신다. 5시 40분 나리분지를 출발한 버스가 어둠속을 달려 통구미로 향한다.
오가는 동안 8585호 기사 쌍둥이 아빠의 유머와 스릴 넘치는 운전 솜씨에 웃음이 빵 터진다. 소득이 높으나 인구가 감소하는 현실과 주유소가 3개이고 신호등이 4개뿐인 울릉도의 환경, 도둑·뱀·공해가 없고 향나무·바람·미녀·물·돌이 많은 3무5다, 울릉도에 반해 울릉도를 품에 안은 가수 이장희와 김완선에 대한 얘기도 듣는다.
저녁을 먹고 거북바위 옆 숙소에서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잤다. 일찍 잠이 깼지만 객지에서 마땅히 할 일도 없다. 4시에 거북바위로 나가 낚시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울릉도에 몇 번 왔지만 거북바위를 이렇게 자세히 관찰한 게 처음이다.
아침을 먹고 유람선 관광을 하기 위해 도동항으로 갔다. 도동항 입구에 임각수 괴산군수의 방문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충북 괴산군수의 방문을 왜 울릉도에서 환영할까? 매스컴에 의하면 10월 29일 충북 괴산군과 괴산의 시골절임배추 영농조합법인이 경북 울릉군과 독도경비대 김치후원협약을 체결하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선포한 1952년 1월 18일을 기념하는 뜻을 담은 김장김치 118포기를 임 군수가 직접 독도를 방문하여 전달하려 했으나 기상이 악화되어 택배로 전달했다.
유람선에 올라 8시부터 1시간 50분 동안 해상관광을 했다. 도동항을 출항한 유람선이 시계방향으로 사동, 통구미, 남양, 구암, 학포, 태하, 현포, 추산, 천부, 죽암, 내수전, 저동을 지나는 사이 우뚝 솟아오른 산줄기와 기암절벽을 비롯해 가두봉등대, 거북바위, 사자바위, 곰바위, 태하등대, 노인봉, 코끼리바위, 송곳바위, 삼선암, 관음도, 섬목, 죽도, 촛대바위, 행남등대가 때로는 가까이에서 때로는 먼발치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유람선을 졸졸 따라오는 갈매기와 새우깡을 던져주는 관광객들의 표정도 구경거리다.
울릉도의 3대 비경인 코끼리바위, 삼선암, 관음쌍굴을 가까이서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현포리 앞바다의 코끼리바위는 표면이 장작을 패어 차곡차곡 쌓아놓은 모습이고 코 부분에 소형 선박이 드나들 수 있는 10m의 구멍이 있어 공암이라고도 불린다. 천부리 앞바다에 우뚝 서있는 삼선암은 높이가 107m, 89m, 58m에 이르는 세 개의 기암으로 지상으로 놀러왔다 바위가 된 세 선녀에 얽힌 전설이 내려온다. 천부리에 딸린 관음도의 관음쌍굴은 높이 14m의 해식동굴 2개로 동굴의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 마시면 장수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유람선으로 해상관광을 하다보면 저동에서 사동까지 해안을 따라가며 산책로가 길게 이어진다. 울릉도 해안 산책의 백미는 도동 부두에서 시작하는 양쪽의 해안산책로다. 10시부터 천혜의 자연환경과 맑은 물이 절경을 만든 행남산책로를 걸었다. 도동항에서 저동의 촛대바위까지 기암절벽과 천연동굴, 무지개다리와 에메랄드빛 바다가 비경을 만드는데 다 돌아볼 수 없는 시간이 주어져 도동등대 입구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고, 사동쪽 산책로는 높은 파도로 출입을 막아 아쉬웠다.
자연의 힘을 이길 장사 없다. 때로는 피난 가듯 쫓겨나야 하는 게 여행이다. 육지에 나갔던 섬사람들까지 고생시킨 바람이 배의 출항시간을 5시 30분에서 3시로, 다시 1시로 앞당기며 울릉도에서 빨리 떠날 것을 재촉했다.
점심을 먹고 호박엿, 미역취, 부지깽이나물, 명이나물 등 울릉도의 특산물을 골고루 샀다. 방금 점심을 먹었지만 울릉도에 왔으니 오징어는 맛보고 가야 한다. 종걸 후배와 도동항 포구에서 회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버스를 타고 씨플라워호가 출항하는 사동의 을릉신항으로 갔다. “오늘 파도가 많이 높아요. 저도 멀미약 팔고 있지만 밤이 멀미약보다 4배 효과 있대요. 동의보감에 나와 있어요. 허준이 실험했대요.” 여객선터미널 입구에서 밤을 파는 사내의 목소리가 구수하게 들려온다. 주의보가 내리면 며칠 묶일 수 있다더니 배가 1시 전에 출항한다.
당연히 일반석에 좌석이 배정된 줄 알았는데 2층의 우등석이다. 가끔은 좋은 자리 비워놓고 통로에 앉아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는 것도 인생살이다. 여수에서 오신 분들과 묵호항에 도착할 때까지 술을 나누며 대화를 했다. 주변 사람들아 하나, 둘 떠나는 나이가 되고 보니 여기 온 분들 모두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4시경 묵호항에 도착해 등대횟집에서 소주잔을 부대며 독도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진하게 달랬다.
늘 그렇듯 차가 청주로 향하자 비에 젖어 잠시 회전을 멈춘 바람개비처럼 여행의 들뜬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는다. 놀멍쉬멍 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자신의 삶으로 만드는 게 여행이다. 집으로 향할 때는 늘 아쉬움이 남지만 좋은 사람들을 사귀며 즐거워했다. 또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연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자신을 만난 여행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