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 세월의 무게에서 느림과 여유 찾는다

2012.12.27 13:30:00

지난 12월 1일, 안동의 하회마을에 다녀왔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렸지만 마을의 오랜 역사와 옛 풍경들이 느림과 여유를 누리게 해줬다.

여행은 어디서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같은 곳을 다녀왔더라도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다. 하회마을 여행에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부용대와 병산서원이다.


부용대 가는 길인 풍천면 광덕리에서 화천서원(경북기념물 제163호)을 만난다. 화천서원은 서애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을 비롯해 류원지와 김윤안의 향사(제사)를 100여년 이상 지내고,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다가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렸지만 1996년에 복원되었다. 철폐령 때 헐리지 않은 강당에서 19세기 이전의 건축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는 화천서원 아래편의 물가에 있다. 문간채, 바깥채, 안채, 별당까지 갖췄는데 문신이며 학자인 류성룡이 말년에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할 수 있도록 탄홍 스님이 작은 서당으로 만들었다.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이 마을을 시계 방향으로 휘감아 돌던 화천이 물길을 반대 방향으로 바꾸는 옥소의 남쪽이다. 옥연정사는 소의 맑고 푸른 물빛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낮은 담장과 노송 한 그루, 앞쪽의 물길과 하회마을이 그림같다. 배로 하회마을을 오가던 옛날과 같이 물가에서 작은 배가 기다린다. 류성룡이 징비록(국보 제132호)을 집필한 곳으로 전하여온다.


부용대는 해발 64m의 절벽이다. 화천서원 옆으로 경사가 급하지 않아 산책하기 좋은 오솔길이 이어진다. 소나무와 갈참나무가 섞여 있는 숲길을 250여m 걸으면 하회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부용대의 정상에 선다. 이곳은 하회마을의 서북쪽 강 건너로 초가집과 기와집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하회마을과 마을을 휘감아 도는 물길이 한 폭의 동양화다.

처음의 지명은 하회의 북쪽에 있는 언덕을 뜻하는 ‘북애’였는데 하회마을의 생김새 때문에 중국 고사에서 연꽃을 뜻하는 부용을 따와 ‘부용대’가 되었다.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물가의 좌우에 화천서원과 옥연정사, 겸암정사가 자리하고 있어 풍경을 더 아름답게 한다.


하회마을은 류성룡 등 고관들을 많이 배출한 양반고을로 유교문화를 고수하며 자연경관과 어우러진다. 섬처럼 생긴 지형 덕분에 임진왜란의 피해가 없어 전래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다. 하회탈 및 병산탈의 예술적 가치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며 유명해졌고, 2010년에는 경주의 양동마을과 함께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풍산평야의 기름진 땅, 마을을 휘감아 도는 물길, 병풍처럼 둘러싼 절벽 등 마을의 위치가 풍수지리의 원리를 따지지 않더라도 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지는 명당이다. 마을은 남북 방향의 큰 길을 경계로 아래쪽은 남촌, 위쪽은 북촌으로 구분한다.

바깥마당에 엘리자베스2세의 방문기념 식수가 있는 충효당(보물 제414호)은 서애 류성룡의 사후에 지은 집으로 서애종택이라 부른다. 충효당 내의 영모각에 서애선생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다. 염행당(중요민속자료 제90호)은 충효당과 더불어 하회마을의 남쪽 사대부 가옥을 대표하는 남촌댁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소실되었다.

양진당(보물 제306호)은 풍산 류씨의 대종가로 사랑채에 ‘입암고택’ 현판이 걸려있고, 입암 류중영 선생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이라 부른다. 고려말과 조선중기의 건축양식이 섞여있는 99칸 중 53칸만 남아있다. 화경당(중요민속자료 제84호)은 양진당과 더불어 하회마을의 북쪽 사대부 가옥을 대표하는 북촌댁으로 사랑채, 안채, 별당채, 사당, 대문간채를 두루 갖춘 하회마을에서 규모가 가장 큰집이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흙담길을 따라 빈연정사, 만송정 솔숲, 나루터, 삼신당 신목 등을 돌아보면 하회마을의 멋진 풍경과 함께 후손들이 전통을 지켜가며 살아가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빈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6호)는 겸암 류운룡이 세워 서재로 사용하던 곳이다. 민속놀이 마당과 만송정 솔숲이 가까이에 있고, 화천 건너편의 부용대와 겸암정사가 바로 눈앞이다. 노송 100여 그루가 자태를 뽐내는 만송정 솔숲(천연기념물 제473호)을 지나고 너른 모래사장을 따라 나루터로 가면 부용대와 옥연정사가 물길 건너편에 있다.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삼신당은 대보름날 동제가 열리고, 하회 별신굿 놀이에서 탈놀이 춤판이 가장 먼저 행해지던 곳이다. 수령 600년이 넘는 노거수 느티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신목으로 잘못 건드리면 동티가 난다는 속설이 있어 둘레에 소원지가 가득 매달려 있다.


병산서원(사적 제260호)은 낙동강을 굽어보고 있는데 서애 류성룡이 31세에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한 서원으로 류성룡과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사당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조선시대의 대표적 유교 건축물이다.

정문인 복례문에서 보면 만대루와 입교당이 뒤편으로 보인다. 2층으로 넓게 지어진 만대루는 대강당 역할을 하던 곳으로 서원 앞에 펼쳐진 낙동강과 너른 백사장, 병풍과 같은 산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만대루의 마루를 받치고 있는 24개의 기둥은 나무 본래의 모양으로 다듬지 않은 주춧돌 위에 세워져 자연미가 물씬 풍긴다. 서원의 핵심적인 건물로 강당 역할을 했던 입교당 앞에 학생들의 기숙사로 이용되었던 동재와 서재가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뒤편으로 가면 류성룡과 류진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 존덕사, 향사 때에 제관들이 출입하던 신문, 사발 형태의 돌 위에 관솔이나 기름 등을 태워 불을 밝히던 정료대, 사당에 올릴 제수를 준비하는 전사청, 책을 인쇄할 때 쓰는 목판 및 유물을 보관하던 장판각 등이 있다.

서원 밖으로 나가면 하늘이 열린 달팽이 뒷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유생들을 뒷바라지하던 머슴들이 사용했던 뒷간으로 진흙 돌담을 달팽이관처럼 시작부분이 끝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출입문을 달아놓지 않아도 안에서 볼 일 보는 사람이 밖으로 들어나지 않는다. 서원 앞 정원, 노송과 백사장,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병풍을 펼쳐놓은 병산도 멋진 풍경이다.
변종만 상당초등학교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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