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살던 시절에는 개발이 살길이었다. 단기간에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급성장을 이뤄내며 겉모습을 화려하게 바꾼 게 우리나라다. 그러다보니 속을 다지는 일은 뒷전이었다. 큰길에서 벗어나 동네 안으로 들어가면 좁은 골목을 만난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길을 걸어보면 개발의 허점을 금방 안다. 불야성을 이루며 사람들로 넘쳐나는 도회지에서도 뒷골목은 늘 찬바람이 불고 컴컴하다.
건물이나 동굴, 무덤 따위의 벽에 그린 그림이 벽화다. 고구려의 옛 무덤에 수렵, 무용, 씨름, 사신도 등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봐 벽화는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다. 먼 훗날 벽화가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좋은 것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다. 기술력도 좋아 오래된 주택들이 헐린 자리에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아파트가 뚝딱 들어선다. 그렇다고 새로운 것만 좋아하거나 헌 것을 마구 버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낡은 것들을 갈고 닦아 재사용하듯 요즘 벽화를 이용해 활기차게 탈바꿈하는 마을들이 늘어나고 있다.
중앙시장 뒤편의 언덕에서 항구와 남망산조각공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통영의 ‘동피랑’, 미당시문학관 가까이에 있어 국화꽃 앞에서가 먼저 떠오르는 고창의 ‘돋음볕마을’, 대표적인 달동네로 드라마 카인과 아벨을 촬영한 청주의 ‘수암골’, 최대 규모 탄광지대의 번화가 사택촌이었던 태백의 ‘상장동’...
아파트가 즐비한 세상, 벽화 마을들이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낡고 허름한 담장에 알록달록 갖가지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벽화에 마을의 옛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벽화 마을에 가면 나이 먹은 사람들은 가난했던 시절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젊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과 동떨어진 모습이 호기심의 대상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좁은 골목을 기웃거리기만 해도 서민들의 삶과 생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부산의 감천동 문화마을이 그런 곳이다. '한국의 마추픽추'로 불리는 감천문화마을은 옛 모습 그대로의 서민형 주택이 밀집한 데다 벽화, 하늘마루, 카페, 아트숍, 어울터 등 볼거리가 많다. 언덕을 따라 이뤄진 마을 앞으로 바다가 바라보여 풍광도 좋다. 벽화와 더불어 27점의 미술작품이 전시되어 평일까지 사람들로 북적이고 지난해 10만 명 가까운 관광객이 다녀가며 부산의 명물이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일본 고베 행정부시장, 중국 칭화대학 전 부총장 등 유명인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첫 느낌이 신선하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주택사이로 실핏줄처럼 이어진 골목들이 오르막과 내리막을 만든다. 이 골목에서 갖은 것보다 더 여유롭고 풍요롭게 사는 사람들의 감성을 닮고 싶은 게 우리네 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