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5일, 청주토요산악회에서 국토의 중앙‧청춘의 고장 양구를 다녀왔다. 이곳에 60여 년 동안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다 지난 2004년 생태관광코스로 개방된 두타연계곡, 북한이 기습적으로 후방을 공략하기 위해 휴전선 비무장지대에 만든 제4땅굴,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이 타원형 분지를 감싼 펀치볼과 북한 땅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을지전망대가 있다.
이른 시간이지만 6시가 되자 용암동을 출발한다. 창밖으로 빗속에서 부지런히 청소를 하고 있는 청소부들이 보인다. 궂은 날씨를 걱정했는데 중부고속도로 오창휴게소를 지나던 6시 50분경 붉은 태양이 짙은 구름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한치 앞도 모르는 세상 마음이라도 편해야 한다. 특히 멀리 떠나는 여행은 더 그러하다. 먼발치로 천년 세월을 이겨낸 농다리가 보인다. 이래서 ‘생거진천’이라고 했나보다. 막 비가 갠 뒤라 들판가득 녹색세상을 만든 풍경이 보기 좋다.
청주토요산악회는 명품 산악회라 총무님이 생수와 떡에 커피까지 타주며 먹을 것을 챙긴다. 더구나 뒷자리에 혼자 앉다보니 장거리 여행에서 공간의 자유까지 누린다. 중앙고속도로 원주휴게소의 무인안내소에서 '국토의 정중앙 양구 즐겨찾기' 여행안내지도를 챙기고 커피도 마신다. 9시경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관광버스가 낭만의 도시 춘천으로 향한다.
‘국토의 정중앙 양구에 오시면 10년이 젊어집니다.’ 양구에서 자주 만나는 문구와 달리 군사경계선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 왠지 생소하게 느껴진다. 양구에 들어선 관광버스가 9시 40분경 읍사무소와 이웃하고 있는 명품관에 도착했다.
두타연 관광은 양구군청 문화관광사이트에 출입신청을 예약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또 오전 10시와 오후 2시 하루에 두 번 예약을 확인하고 입장료(어른 2000원)를 낸 후 인솔자와 함께 들어가야 한다. 청정 환경에서 자란 농특산물과 관광상품을 전시‧판매하는 특산물전시관과 휴가 나온 군인들의 쉼터가 있는 명품관을 둘러보고 10시경 두타연으로 향했다.
양구시내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물줄기가 파로호다. 북쪽으로 31번 국도를 달리면 군용트럭과 군부대가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 특수작물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한우를 키우는 축사, 땅 냄새를 맡은 벼 포기, 인정이 넘나들기 쉬운 낮은 담장 등 여느 시골과 같은 풍경이다.
왼쪽의 460번 지방도로 들어서 녹음이 짙은 고갯길을 오르고 도고터널을 지나 평화누리길이목정안내소에 도착한다. 이곳부터는 군사작전상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 지역이라 군인들이 술 등 반입금지 물품이 차량에 실려 있는지를 철저히 검사한다. 10시 40분경 바리케이드 사이로 민통선을 통과하자 길가의 철조망을 따라가며 역삼각형의 빨간색 '지뢰' 표지판이 심심찮게 보인다.
주차장에 도착하면 역사와 자연이 살아 숨 쉬는 두타연의 상징 열목어 조형물, 두타연과 소지섭길 안내판, 해발 338m를 알리는 나무기둥, 자연보호 표석과 음식물 반입금지 안내문이 맞이한다.
여러 곳의 사람들이 모이니 조용하던 숲속이 왁자지껄하다. 동행한 문화관광해설사가 두타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두타연계곡의 물은 금강산에서 흘러 내려온다. 사람들은 철조망에 가로막혀 오가지 못해도 계곡의 물은 늘 자유롭다.
11시부터 두타연계곡 트레킹을 시작했다. 주차장에서 북쪽의 평화누리길을 걸으면 왼쪽으로 전투위령비가 보인다. 6.25전쟁 막바지 주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희생된 장병들을 추모하는 위령비로 뒤편에 ‘배고픔으로 삼백 예순 날 사무친 그리움으로 삼백 예순 날’로 시작되는 ‘길 가소서’가 써있어 가슴 뭉클하게 한다.
위령비의 맞은편 광장에 전후 세대의 작가들이 작품을 전시했다. 관광객들이 추억을 남길 수 있는 포토존도 있다. 낡은 전차와 전시된 작품이 왠지 전쟁으로 일그러졌던 우리의 역사와 남북분단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다.
광장을 지나면 계곡을 따라 숲길이 이어지는데 계곡으로 들어서는 오른쪽에 천년의 역사를 지닌 두타사 터가 있다. 발굴 결과 ‘두(頭)’자 명문이 발견되어 절터로 확인되었다는데 지금은 달랑 안내판만 하나 세워져 있다. 삶의 걱정을 없애고 욕심을 버리는 ‘두타(頭陀)’가 이곳의 청정 자연환경과 잘 어울린다.
직진하면 청정 자연 속에서 여유를 누릴 수 있는 두타정과 발아래로 물줄기가 흘러가는 전망대를 만난다. 전망대가 두타연폭포 바로 위에 세워져 금강산 유점사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좁은 바위 사이에서 용틀임하는 모습과 폭포가 만든 큼직한 소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잠시 숲길을 따라 두타연계곡을 거슬러 올라간다. 두타연 계곡은 음식물 먹는 것까지 통제하는 청정지역이다. 이곳에서 만난 나뭇잎은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고 바위들은 울퉁불퉁 생기가 넘친다.
오른쪽 물가로 내려서면 계곡에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일부의 관광객은 북에서 흘러온 차가운 물에 손이나 발을 담그고 즐거워한다. 징검다리에서 바라보면 북쪽은 물길 위로 높은 산이 가로막고, 남쪽은 방금 지나온 두타정과 전망대가 가깝다. 단순한 이치지만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징검다리의 돌부리를 넘어 남쪽으로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며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남북관계를 생각한다.
냇물을 건넌 후 오른쪽 숲길을 걸어 나무계단을 오른다. 이곳의 조그만 전망대에 서면 맞은편의 두타정과 전망대가 가깝다. 두타연폭포가 왼쪽 바로 아래편에 있지만 나뭇잎이 가려 보이지 않는다.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계곡 옆으로 데크 길이 이어지고, 오른편에 물가로 내려서는 통로가 있다.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지만 연못과 폭포의 멋진 모습을 감상하려면 물가로 가야한다. 이곳이 연못(소)의 깊이가 12m나 되는 국내 최대의 열목어 서식지 두타연이다.
두타연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매력이다. 금강산에서 흘러온 물이 암반으로 이루어진 협곡의 절벽 밑으로 하얀 포말을 토해내는 폭포도 볼거리다. 두타연 아래편의 징검다리에서 바라보는 폭포와 크고 작은 바위들이 자리 잡은 냇가의 출렁다리가 멋지다.
출렁다리를 건너 숲길을 따라가면 생태탐방로가 이어진다. 두타연폭포와 주차장이 가까운 곳에서 탐방로가 끝난다. 해설사를 따라 한 바퀴 다 돌았는데 주어진 시간이 20여분 남았다. 다시 전망대에 올라 12시까지 홀로 시간을 보냈다. 생수를 마시다 또 철조망의 지뢰 표지판과 붉은 꽃을 바라본다. 멀기도 하고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 가까이 있는 사람들끼리 열목어 조형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소풍 나온 초등학생들처럼 뱅이골공원의 잔디밭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다. 모든 사물은 위치에 따라 역할이 다르다. 활짝 핀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북한 땅으로 평화를 전하는 전령사를 닮았다.
점심을 먹은 후 오전에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오다 삼거리에서 북쪽길로 접어든다. 금강산로와 펀치볼로를 달려 양구통일관으로 가다보면 차창 밖으로 ‘금강산 가는 길’ 안내판이 들어온다. 돌산령터널을 지나 해안면에서 만나는 통일관의 좌우에 양구 도솔산·펀치볼 지구 전투전적비와 전쟁기념관이 있다. 녹슨 철모가 전쟁의 비극을 상기시키는 통일관에서 수속을 밟고 1시 40분 제4땅굴로 향한다.
통일관에서 북서쪽으로 달려 언덕 위에서 남침분쇄 조형물이 반기는 제4땅굴에 도착했다. 안보전시관에서 10여분 영상물을 관람하고 전시물을 돌아봤다. 전시관에서 땅굴로 가다보면 화약 냄새로 폭탄을 찾아내 땅굴을 수색 중이던 군인들의 목숨을 살리고 자신은 죽어 소위로 추서된 충견 헌트의 동상, 무덤, 비석이 있다.
우리가 땅굴을 발견하기 위해 역으로 파내려간 340m 길이의 갱도를 걸어 내려가면 4번째 발견된 제4땅굴을 만난다. 우리가 사용했던 기계가 갱도를 뚫으며 남긴 자국이 나이테처럼 선명하다. 왕복 운행하는 전동차에 앉아 폭이 좁은 땅굴의 내부는 물론 북측이 가설한 선로와 광장을 구경한다.
2시 50분경 가칠봉 능선에 위치한 을지전망대로 향한다. 양구는 높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로 전쟁 당시 9개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던 지역이다. 전망대에 오르는 산길은 안전벨트 착용을 여러 번 얘기할 만큼 오르막이 급해 차가 신음소리를 내는데 산중턱의 바리케이드 앞에서 또 수속을 밟는다.
드디어 정상에 우뚝 서있는 을지전망대에 도착했다. 개성과 금강산에 다녀오며 봤던 북한의 산은 헐벗은 민둥산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북한과 우리의 경계선을 한눈에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숲이 우거졌다.
이곳에서는 우리 측의 초소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철저히 사진촬영을 금한다. 날씨가 좋으면 비로봉을 비롯한 금강산 줄기가 육안으로 보인다는데 매봉의 선녀폭포와 자급자족하기 위해 일궜다는 밭마저 희미하게 보였다. 그래도 철조망 너머 북한의 하늘에 떠있는 흰 구름이 멋지다.
냉전시대에는 북한이 우리 군인들을 선동하기 위해 선녀폭포에서 여군들이 비키니차림으로 목욕을 하고, 우리는 을지전망대와 가까운 봉우리에 수영장을 만들고 미스코리아선발대회를 개최하며 지금으로 봐서는 믿거나 말거나 같은 코미디가 펼쳐진 현장이다.
전망대에서 펀치볼의 독특한 지형이 한눈에 들어온다. 펀치볼(punch bowl)은 전쟁을 취재하던 종군기자가 해안면 일대의 분지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을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이 타원형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 큰 화채 그릇을 닮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또한 피의 격전지였던 펀치볼 전투에서 총알이 떨어져 주먹으로 싸운 육탄전이 펀치볼을 연상시킨다. 펀치볼포토존에서 기념사진도 남겼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민속전시관 옆 휴게소에서 비빔밥으로 이른 저녁을 먹고 4시 40분경 청주로 향했다. 청주토요산악회 임원들 덕분에 의미 있는 여행지 양구를 편하게 다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