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과 베개

2014.08.11 13:48:00

입추가 지나자마자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다. 참으로 자연의 섭리는 신기하고도 오묘하다. 엊그제만 해도 덥다고 난리를 쳤었는데, 이제는 이불을 끌어당기니 사람의 심리가 간사하다. 이처럼 더위가 물러간 것은 좋지만,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고 보면 세월의 흐름이 결코 반갑지가 않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되면 또 한 살의 나이를 더하게 되니 말이다.

어제는 아내가 여름내 덮었던 이불을 빨기 위해 새 이불로 갈고 더불어 새 베개도 함께 꺼내 놓았다. 여름내 어두운 장롱에서 습한 기운을 듬뿍 머금은 이불은 쾌쾌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베란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널어놓으니 반나절 만에 뽀송뽀송하니 마르고 어느새 냄새도 가셨다. 베갯잇도 벗겨 잘 세탁한 다음 새로 씌웠더니 개운한 맛이 일품이다.

나는 성격이 까다로운 편이라 아무 베개나 베지 못한다. 너무 딱딱해도 안 되고 너무 부드러워도 안 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평소 베던 낮은 베개를 베면 기도가 막혀 잠을 잘 이룰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갔더니 상기도 저항증후군이란다. 낮은 베개를 베고 잠들면 혀가 기도로 말려들어가 숨을 쉴 수 없는 병이라니 참으로 충격적이다. 더구나 늙으면 저절로 생기는 증상이라니 더욱 답답한 노릇이다. 유일한 치료방법은 3백만원에 이르는 고가의 양압기를 착용하고 자면 괜찮단다. 양압기를 착용하고 잔다는 것은 마치 병원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착용하고 누워있는 환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담요를 둘둘 말아 베개에 얹고 잠을 잤더니 그나마 숨은 좀 쉴 수 있었다. 하지만 베개가 너무 높아서 그런지 자고 일어나면 뒷목이 뻣뻣하게 굳으면서 통증이 왔다. 통증이 심해지니 깊은 잠을 잘 수가 없고 또 일찍 깨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아무리 늦게 잠자리에 들어도 새벽 다섯 시 반이면 어김없이 눈이 떠졌다. 목과 어깨의 통증 때문이었다.

아하, 그래서 고침단명(高枕短命)이란 옛말이 있나보다. 이는 의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는 말 같다. 베개를 높이 하고 잤더니 목뼈가 정상적인 'C'자형을 이루지 못하고 거북이 목처럼 앞으로 구부정하게 되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목 부위의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져 숙면을 방해하고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옆으로 자거나 엎어져 잠을 자 보았더니 가슴이 답답하고 혈압이 높아지며 목이 틀어지는 단점이 생겼다. 자고 일어나도 온몸이 찌뿌둥하니 영 개운치가 않았다. 몸의 컨디션이 좋지 못하니 매사 의욕이 저하되고 우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사람은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다.

하루는 아내가 텔레비전 홈쇼핑을 보다가 숙면을 취할 수 있다는 베개를 거금 20만원을 주고 주문했단다. 밤새 잠 못 드는 남편을 위해 큰맘 먹고 구입한 것이라니 딱히 나무랄 수도 없었다. 속는 셈치고 그 베개를 베고 잠을 자보았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현상이 일어났다. 베개가 그리 높지도 않았는데 기도가 전혀 막히지가 않았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스르르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눈을 떠보니 바로 아침이었다. 모처럼 꿀잠을 잔 것이다.

잠자리에서 기지개를 한껏 켜고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새벽의 신선한 기운이 온몸에 강하게 파고들었다. 잠을 잘 잤기 때문이다. 그동안 베개 때문에 20~30분 간격으로 몸을 뒤척였고 그러다 보니 쓸데없이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려 숙면을 방해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베개의 중요성이 온몸으로 체감되는 순간이다.

인간은 인생의 삼분의 일을 잠으로 보낸다. 따라서 잠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겠다. 하지만 잠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숙면은 건강에 절대적인 조건이다. 이처럼 중요한 숙면을 취하려면 베개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인체공학적으로 잘 만들어진 베개, 산국 향내가 물씬 풍기는 국화베개, 찬 기운을 가득 품은 메밀베개, 어머니가 손수 베갯잇을 달아주신 엄마표 사랑 베개 등등.

문득 삼복염천에 느티나무 그늘에서 대나무 베개를 베고 매미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며 단잠을 주무시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나도 그 옆에 돗자리를 깔고 하얀 홑청을 두른 베개를 베고 누워 고향의 향기를 맡으며 단잠을 청하고 싶다.
김동수 교사/수필가/여행작가/시민기자/EBS Q&A교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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