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에서 십오 분 거리
신미나
마당이 있는 저 집에서 살면 참 좋겠다 언덕 위에는 여자대학교가 있고 배구공 튕기는 소리가 가끔 들리고
비빔국수 잘하는 냉면집도 있고 가을이면 키 큰 은행나무가 긍지처럼 타오르는 동네
문방구 평상에 한참을 앉아 있어도 핀잔주지 않는 할머니가 있고 옆에서 신문지 깔고 고구마순 껍질이나 같이 벗기고 싶고
해 지기 전에 수건을 걷어 오른팔에 얹고 옥상에서 내려갈 때 젖이 불은 개가 골목을 지나가는 것을 보기도 하는
집 보러 갔다가 그냥 간다 이가 썩어 구멍난 데를 혀로 쓸어 보면서 돌아보는 사직동
《 리토피아》2015 겨울호
* 신미나 1978년 청양 출신. 2007년 《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싱고,라고 불렀다』.
<시 감상>
신미나 시인은 이제 30대 후반의 시인이다. 그런데 시 속에 보이는 정서는 여타의 젊은 시인들과는 다르다. 마음씨 너그러운 할머니가 있고 그 할머니가 고구마순 껍질을 벗기는 모습에서 시인의 소박한 시정신이 드러난다. 전셋집을 보러 다니는 화자는 가난한 시골 태생으로 도회지에 올라와 이제 막 신혼 생활을 시작하려는 새 신부가 아니었을까. '수건을 걷어 오른팔에 얹고 옥상에서 내려갈 때 젖이 불은 개가 골목을 지나는 것을 바라보는' 모습은 아무래도 신혼살림을 막 시작한 새색시의 모습이어야 제격이기 때문이다. 젖이 불은 개라면 생명의 탄생을 암시한다. 어쩌면 젊은 화자는 생명 탄생의 신비를 스스로 체험하기를 염원하고?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연이 아프게 와 닿는다. 앞에 열거했던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는 집을 보고서도 쓸쓸한 표정으로 그냥 돌아서는 화자. 거기에서 화자의 가난과 우리 시대 젊은이의 초상을 볼 수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화자의 소박하고 순정한 정서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문명이 발달해 간다고 해도 시의 본령은 바로 이런 정서에 있고 시가 통째로 문명 비판에 앞장서거나 현대 문명의 난해성에 무리하게 편승하려고 하면 시 본래의 사명에서 멀어지고 말 것이다. 시를 다시 찬찬히 읽어본다. 읽으면서 조용히 시 속의 풍경을 마음속으로 그려본다. 참 따뜻한 시다.(최일화/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