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법이나 표준어는 딱딱하고 지루하다고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을 담고 있는 것들도 적지 않다. 어떤 말이 옳고 그른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의외로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와 '그러고 나서'가 그러한 경우이다.
'그리고 나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흔히 쓰이는 말이다.
(1) 한두 걸음씩 걸어도 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또 울었다. <이광수, 흙>
(2) 채화꽃이 만발할 때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시는 못 가보고 말았지요. 그리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북간도로 떠났으니까요 <박완서, 미망>
위의 예에 나와 있는 '그리고 나서'는 '그러고 나서'로 바꾸어도 의미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와 '그러고 나서'는 의미가 같은 셈인데 이처럼 의미가 같고 형태가 유사한 말이 있을 경우 두 말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동의 관계인지, 의미나 용법에서 섬세한 차이가 있는지가 탐구의 대상이다.
먼저 '그리고 나서'의 띄어쓰기 문제부터 생각해 보자. '그리고나서'를 한 단어로 다룰 수도 있고, '그리고∨나서'와 같이 두 단어로 다룰 수도 있다. 한 단어라면 '그리고, 그러나, 그런데'와 같은 접속 부사와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한 단어가 아니라면 '그리고∨나서'로 분석되는데 이때는 선행 요소와 후행 요소의 문법 범주가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그리고나서'가 한 단어가 아니고 '그리고∨나서'의 구성이라는 근거로는 아래와 같은 쓰임을 들 수 있다.
(3) 전라좌도의 해변을 돌면서 어디든 마음 내키는 대로 정박한다. 그리고 나면 영접 나온 그 지방 벼슬아치들을 따라 관아에 향응을 받는다. <유현종, 들불>
위의 예에 나타나는 '그리고 나면'을 보면, '그리고나서'와 같이 한 단어로 형태가 굳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고나-' 전체가 하나의 용언이거나 '그리고'와 '나-'가 결합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4) 그리고 {나서, 나니, 나면, 나자 ……}
'그리고나-'가 하나의 용언일 가능성은 매우 적다. 무엇보다 그러한 단어가 국어사전에 올라 있지 않으며 의미상으로도 좀 더 분석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따라서 '그리고 나서'를 '그리고'와 '나서'로 분석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나서'의 '나-'가 용언의 어간이라면 '그리고'는 무엇일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그리고, 그런데, 그러나'와 같이 학교 문법의 접속 부사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에 '고'가 결합한 구성으로 보는 것이다.
먼저 접속 부사로 볼 경우 접속 부사 다음에 용언의 활용형이 연결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5) {그리고, *그런데, *그러나, *그러므로 ……} 나서
'그리고 나서'를 제외한 '*그런데 나서, *그러나 나서, *그러므로 나서' 등은 전혀 쓰이지 않는다. 국어에서 접속 부사는 문장이나 단어를 연결해 주는 것이므로 용언의 활용형이 바로 연결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설명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그리고 나서'의 '그리고'는 접속 부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예를 보면 '그리고 나서'는 '그리고'와 '나서'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와 '-고 나서'로 분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먹고 나서, 자고 나서, 뛰고 나서, 웃고 나서 ……
위의 예들은 모두 '-고 나서'를 공유하고 있으며 '-고 나서' 앞에는 동사가 나타난다. 형용사나 서술격 조사가 오면 비문이 된다.
(7) *예쁘고 나서, *슬프고 나서, *사람이고 나서 ……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나다'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뜻풀이되어 있다.
(8) 나다 [보조] (동사 뒤에서 '-고 나다' 구성으로 쓰여) 앞말이 뜻하는 행동이 끝났음을 나타내는 말.
즉 '그리고 나서'는 '[동사]+-고 나다'와 같은 보조 용언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는 동사일 수밖에 없다. 동사 '그리-'는 다음과 같이 쓰인다.
(9) 그림을 그린다. / 지난 날을 그린다.
문제는 동사 '그리-'가 '그리고 나서'와는 뜻이 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림을 그리거나 지난 날을 그리는 것과 '그리고 나서'는 의미가 다르다.
이러한 문제는 동사 '그리-'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짝을 이루는 '이, 그, 저'가 '*이리고 나서, *저리고 나서'에서는 성립하지 않는 것도 동사 '그리-'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결론적으로 동사 '그리-'를 쓴 '그리고 나서'는 동사 '그러-'를 잘못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를 써야 하는데 '그리고'에 이끌리거나 '그러다'의 의미를 가진 방언형 '그리다'에 이끌려 '그리고 나서'를 쓰게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리고 나서'와 '그러고 나서'는 의미와 쓰임이 같았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이러고 나서, 저러고 나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그, 저'의 짝을 만족시킨다. 또한 의미적인 면에서도 완전히 일치한다.
동사 '그러-'와 관련하여 '*그리고는' 또한 '그러고는'을 잘못 쓴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접속 부사 '그리고' 다음에는 보조사가 붙지 않으므로 '*그리고는'과 같은 구성은 잘못이다. 이 또한 '그러고는'을 '그리고'에 이끌려 잘못 쓴 것이다.
(10) 그때는 들은 척도 않했잖아? 그러고는(*그리고는) 이제 와서 몰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