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만나는 휴식 같은 여행
여름이다. 긴 방학, 분주한 일상을 떠나 모처럼 여유로운 여행의 시간을 가져 볼 수 있는, 삶의 흔치 않는 기회의 시간이기도 하다. 가족이나 친구 혹은 교사와 학생이 함께 하는 여행의 미덕은 무엇일까? 여행이 주는 여러 가지 유익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긴 호흡으로 넉넉한 시간을 더불어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바삐 움직이는 도시적 일상의 시간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는 작은 조각으로 파편화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치밀하게 구획화된 잠깐의 시간동안 기능적으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피상적인 관계는 서로에 대해 극히 단편적인 이해만을 가능하게 하고 그만큼 참다운 인간 존재의 만남과 소통은 어렵게 된다. 영화 〈마르셀의 여름〉은 좋은 여행의 시간이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관계의 묘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잔잔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휴식과 같은 작품이다.
마르셀, 아버지의 빈틈을 보다
마르셀의 아버지는 교사이다. 사명감도 투철하고 실력도 있으며 동시에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남다른 모범적인 선생님으로서 아버지는 마르셀에게 있어 절대적인 권위와 사랑, 존경의 대상이다. 어린 마르셀의 눈에 많은 학생들 앞에서 확신을 가지고 지식과 진리를 선포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거의 신에 버금가는 완전한 모습이었다. 물론 마르셀의 시선 밖에서 묘사된 아버지는 새로 부임한 학교에서 겉으로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첫 수업을 진행하지만 이내 칠판으로 돌아서서는 긴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다. 다만 분주한 일상 속에서 잠깐씩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마르셀에게 그런 '빈 틈'이 발견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러던 중 마르셀의 가족은 여름방학 기간을 맞아 시골 별장을 빌려 한 달여가 넘는 제법 긴 휴가를 지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마르셀은 영화 속 내레이션처럼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시간과 만남을 경험한다. 시골로 내려간 처음 얼마간의 시간동안 아버지는 마을 광장에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한 쇠구슬 던지기 게임에서 멋진 실력을 발휘하는 등 마르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든 것이 가공된 도시의 문화와 교과서에 실린 이론에 익숙한 아버지의 능력은 실제 '삶'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시골에서 그 허약한 실체를 이내 드러내고 만다. 그 상징적인 사건은 단조로운 휴가에 즐거움을 주기 위한 사냥과 관련하여 발생한다. 사냥을 떠나기 전 사냥감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아버지는 나름대로 사냥의 전문가임을 자처하는 마르셀이모부의 사소한 질문을 받게 된다.
마르셀은 모든 지식에 통달한 아버지가 당연히 멋진 답을 내놓을 것을 기대하지만 정작 아버지는 엉뚱한 답은 물론 심지어 자신이 대충 가르쳐 준 답까지 말하며 허둥거린다. 실망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 사냥에 나서 보게 된 아버지는 새를 잡기는커녕 도리어 이모부의 사냥을 방해하기나 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해 있었다. 총을 다루는 어설픈 실력은 물론 사냥감인 새들의 종류조차 제대로 아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마르셀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거의 충격을 받을 지경이다.
마르셀, 모순을 받아들이다
이러한 마르셀의 충격은 사실 우리에게 그리 낯선 어떤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대개 한 때 자신이 존경해마지 않았던 사람이 실상 그에 합당한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큰 실망과 좌절감을 느껴 본 경험을 가지고 있다. 교사는 그 상징적인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최근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사제지간의 관계에서 적잖은 학생들은 헌신적인 사랑과 열정의 선생님을 특별하고 완전한 존재로 상상하고 신뢰하곤 한다. 우스개 소리로 어릴 적 생각에 선생님은 화장실도 안가는 분들로 생각하던 때가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효과적인 교육을 위한 권위를 부여하는 일종의 ‘아우라’로서 교사나 부모의 완전성에 관한 ‘환상’은 그 유용성만큼이나 위험성도 적지 않다. 왜냐하면 교사를 포함한 대개의 인간은 그런 완전성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아버지의 완전성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마르셀은 실망 역시 클 수밖에 없었다.
마르셀의 실망을 알 수 없었던 아버지는 한 술 더 떠 어렵게 잡은 황제 자고새를 들고 자랑스레 사진을 찍는다. 그 순간 마르셀의 머리에는 얼마 전 낚시에서 잡은 큰 물고기를 들고 사진을 찍은 동료 교사를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 어리석은 짓이라며 조롱하였던 아버지의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가르치는 사람에게 있어 가장 지키기 어려운 교육의 덕목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언행일치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 일게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아이들은 부모나 교사의 '말'이 아닌 그들의 '행동'을 보고 배운다. 그런 이유로 적잖은 아이들의 문제는 본인들보다는 오히려 그네들이 속한 가정이나 학교의 역할모델 당사자인 부모나 교사로부터 말미암는다. 마치 마르셀의 아버지처럼 그들은 자신이 비난해마지 않았던 행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그런 모순을 깨닫지 못한다. 정작 그 모순을 발견하는 것은 마르셀과 같은 아이들의 시선이다.
마르셀, 아버지의 영광을 외치다
믿었던 아버지에 대한 이런저런 실망에도 불구하고 마르셀은 그런 아버지를 외면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는 영화의 원제목처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하늘을 향해 아버지가 잡은 황제 자고새를 높이 치켜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답한다. 무엇보다 먼저 그들은 여행 중 이었다. 긴 시간을 같이 한다는 것은 서로의 약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위험성을 내포하지만 이는 동시에 그런 약점을 모른 채 지내왔던 피상적인 관계가 이러한 계기를 통해 서로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면서 관계를 더욱 깊고 견고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을 마련하기도 한다. 그것이 단편적이었든, 오해였든 간에 그간의 생활에서 보여준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은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마르셀로 하여금 그의 연약함에 대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어떻게든 그런 아버지의 약점을 감싸 안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마르셀이 사냥터에서 계속 된 실수 속에서 거의 우연으로 아버지가 쏘아 떨어뜨린 희귀하고 값비싼 '황제 자고새' 두 마리를 누구보다 빠른 걸음으로 잡아 치켜 올리며 '아버지의 영광'을 외쳤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참된 사랑이다. 비록 마르셀은 아버지의 인간적인 한계로 인한 부분적인 일관성의 상실을 목격했지만,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 보다 근본적인 관계에 있어 아버지가 자신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마음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흔히 말하듯 요즘 청소년은 이전의 그 어떤 세대의 동년배들보다 감각을 중시하는 직감적인 문화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를 생각 없이 삶을 살아간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그만큼 아이들이 겉으로 보이는 말이나 논리, 개념, 그럴듯한 구호나 가르침보다 그 이면의 진실한 마음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마르셀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모부의 입담에 아버지가 힘없이 밀려도, 또 사냥에서 허둥거리며 초보의 미숙함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심지어 잘 하지 않던 거짓말을 자신을 위한 것이라며 늘어놓아도 그런 아버지를 오히려 '귀여운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긴장과 갈등, 불신의 골이 깊어가는 우리네 교육현장에 정말 필요한 것은 함께 하는 '여행'의 시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