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화하고 소통하며 산다. 산다는 것이 곧 소통의 현존(現存)을 증명하는 것이지 달리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소통이 끊어진 곳에 삶의 좌절이 있고, 소통이 왜곡되는 곳에 배신의 분노가 있고, 소통이 실종되는 곳에 관계의 파탄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소통이 거창한 그 무엇인 것 같지만, 실상 소통은 소박한 것이다.
소통이란 것의 반은 내가 누구에겐가 말하는 것이고, 나머지 반은 내가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이다. 모든 소통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잘 안 되면 소통은 잘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소통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행과 고통을 가져다준다. 안 되면 말고 하는 식으로 다스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소통의 문제를 보는 지혜의 눈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소통을 주로 말하기의 문제로 본다. 내가 말을 잘못 해서 소통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듣는 것이 말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듯이, 말하는 것은 듣는 것에 의존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말하기의 실패는 듣기의 실패에 반드시 연동되어 있다. 그래서 듣기의 지혜가 중요하다. 그런데 잘 듣는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소백산맥 자락 시골 마을에 사는 K씨는 50대 후반의 성실한 농사꾼이다. K씨는 지난 5월 어버이날을 맞아 이른바 효도관광이란 걸 다녀왔다. 자식들이 부모님 노고를 위로한다고 돈을 모아, 경치가 뛰어나다는 중국 장가계 관광여행을 보내 드렸단다. 생전 처음 해외여행에 나선 K씨 내외는 자식들의 정성이 고마웠다. 그만큼 소중한 여행으로 생각하고, 장가계의 절경들을 감탄하고 또 감탄하며 구경하였다. 그야말로 신선의 영토를 보는 듯했다.
효도관광을 마치고 돌아 온 K씨는 장가계 다녀 온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곁들여 자식들 효성도 자랑하고 싶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이렇듯 강한 소통의 욕구가 있기에 자기 존재의 근거가 비로소 확인되는 것 같았다. 이렇듯 소통은 삶을 활기 있게 추동시키는 원천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들 모두도 이와 비슷한 유형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마을회관에서 모임이 있던 날, K씨는 장가계 다녀 온 일을 은근 슬쩍 꺼내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별 자랑거리가 아닌듯한 말투로 시작했다. ‘애들이 이번 봄에 쓸데없는 신경을 써서 팔자에 없는 구경을 하고 왔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꺼낸다. 장가계에서 현지 가이드가 전해 준 이야기들을 보태어 가며, 세상에 그런 절경은 없을 것이라고 소감을 펴 나갔다. 이웃들이 부러운 듯 경청하자 K씨의 이야기는 소통의 신명을 얻는 듯했다. 듣고 있던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나섰다. 농협인가 어딘가에 있다가 작년엔가 퇴직한 L씨가 장가계 이야기를 그냥 죽 듣고 있지 못한다. 할 말이 많다는 표정으로 나섰다.
“장가계 경치, 그 참 일품이지. 내가 3년 전에 다녀왔는데, 한국 사람들 몰라서도 못 갈 때야. 나는 장가계 들러 원가계까지 둘러보고 왔었는데. 하여튼 관광 상품 중에서도 제일로 비싼 걸루 다녀왔지. 내 작년에도 자식들이 하도 다녀오라고 해서 말이야, 중국 황산이라는 데도 갔다 왔는데 말이야, 황산은 장가계하고는 또 다른 맛이야. 그 케이블카로 올라가면서 단풍 보는 맛이 끝내주더라고!”
물론 처음 장가계 이야기를 꺼내었던 K씨의 말은 이미 끝나 있었다. L씨가 무어라 이야기 마당으로 K씨를 다시 끌어 들였으나 그는 더 이상 소통 의욕을 잃은 듯했다. 얄미웠을 것이다.
심리학에서 일컫는 용어 중에 ‘I-knew-it-all-along’ 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나도 그거 죽 다 알고 있어’ 쯤의 뜻이 되는 말이다. 남의 이야기를 그 사람의 마음 형편이 되어서 들어 주지 못하는 마음 상태를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심리적 현상은 일종의 권력 부리기(powering)에 해당한다. 아는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고, 힘이 없는 사람에게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I-knew-it-all-along’ 현상은 곧 ‘나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정치권력이든 지식 권력이든 부의 권력이든 가진 사람이 듣기를 잘 할 수 있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L씨가 그렇게 끼어들 듯이 말하지 않고, K씨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참으로 좋은 구경했다. 효자 자식 두어서 참 좋겠다”고 말해 주었다면 어떠했을까. 두 사람의 소통은 아름다운 상생의 관계를 만들어 내며 꾸준히 발전해 갔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K씨는 알 것이다. 아니 동네 사람들 모두 알 것이다. L씨는 이미 그 이전에 중국 여행 경험이 많았다는 것을…. 그러함에도 전혀 아는 티 내지 않고, K씨의 장가계 이야기를 한없는 공감적 이해의 마음으로 들어 준, L씨의 인격을 우러러 볼 것이다. 그런데 그날 L씨는 좌중으로부터 얄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이 L씨가 가진 듣기 능력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인지심리학자들은 보통 듣기의 단계를 세 단계로 나눈다. 처음 단계는 ‘들리기(Hearing)’의 단계이다. 말소리가 그냥 귀에 들려오는 수준을 말한다. 청각 기관에 장애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본 청각 능력의 수준을 ‘들리기’의 단계라 한다. 두 번째 단계는 ‘듣기(Listening)’의 단계이다. 말소리를 식별하고 단어의 소리와 의미를 알아차리며 들을 수 있는 능력의 단계이다. 주의와 집중에 의해서 듣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냥 들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단어나 문장의 소리와 더불어 그 의미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다.
따라서 이 ‘듣기’의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훈련과 학습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는 ‘총체적 이해로서의 듣기(Auding)’이다. 이 단계에서 듣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 경험과 배경 지식이 모두 동원되어서 말하는 사람의 메시지를 감상하고 평가하여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듣기 능력을 발휘한다고 보는 것이다. 듣는 메시지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메시지가 지닌 다양한 맥락을 모두 고려하여 그야말로 총체적인 이해를 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K씨와 L씨의 사례를 보면, 참으로 ‘듣기 능력’의 최상은 끝이 없는 듯하다. 그것은 아마도 인지적 측면에서 한껏 높은 수준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총체적 이해로서의 듣기’를 넘어서는 능력임이 틀림없다. 아니 그것은 그냥 능력이라기보다는 도덕적 성숙성이 잘 우러난 인격의 경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잘 듣는 사람’이 보여주는 최선의 경지란 ‘잘 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더 부연하여 말하면, 들어 준다는 표도 내지 않고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상대를 향한 겸손과 존중이 내면의 덕성으로 배어들어서 그것이 듣기의 장면에 자연스럽게 비치는 것이다. 잘 듣는 능력 속에 이런 도덕적 자질이 숨어 있다니.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남의 말을 들어주는 일이야말로 무어 그리 어렵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흔한 말로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든 몸의 노역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귀가 닳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듣는 일의 쉽고 어려움을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기준으로만 파악하려는 속 좁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듣기의 지혜에 가 닿을 수 없다. 마땅히 훌륭한 듣기란 마음의 다스림과 내면의 수양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가장 저급한 듣기의 수준이 무엇인지를 눈치 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I-knew-it-all-along’에 빠져 있는 듣기 심리라 할 수 있다.
나는 가르치는 선생이다. 수업도 소통의 일종이라고 한다. 나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발신자의 자리에 선다. 그리고 많은 말을 한다. 수업시간에도 주로 내가 말을 하고, 학생들과의 대화 시간에도 주로 내가 말을 하고 있다. 누군가 풋풋한 의견이라도 내려고 하면, 누군가 득의양양한 경험이라도 자랑할라치면, 그걸 열심히 경청하려고 하기보다는, 나는 금방 노련한 경험자인양 ‘I-knew-it-all-along’의 심리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어 보인다. 참으로 많이 그러했었다. 미명(未明)의 한복판에서 갇혀 있었다고나 할까. 잘 듣는 능력이란 기능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덕성의 영역에 있음을 이렇게 무디게라도 깨달아 가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