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축구는 생활이 아니라 ‘밀리면 끝나는 전투’였던 것 같다. 그런데 아들 두리는 확실히 다르다. … 본인도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축구선수이면서 베컴의 자서전을 머리맡에 놓고 잠들거나 지단에게 가서 공에 사인을 받고는 즐거워하는 것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대단한 선수였어도 나에게는 한번 붙어 보고 싶은 경쟁자일 뿐이었다. 우리 시대의 삶은 ‘성공’에 모든 것을 두었다. 그러나 두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행복과 즐거움’이 그들의 중심에 있는 것 같다… <후략>
이 글은 2006년 6월 차범근 감독이 자기 아들과 함께 월드컵 해설을 하면서 느낀 바를 담백하게 적은 칼럼이다. 그는 이 글에서 아들과 자신의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명확히 지적한다. 차범근과 차두리는 같은 축구를 하지만 그 둘에게 축구의 의미는 달랐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나라의 부모세대와 자녀세대는 같은 단어를 말하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이것은 모두 새로운 정보화 시대의 도래와 그 속에서 일어난 새로운 사회화 과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은 처음에는 우리에게 시공간의 제약을 적게 받는, 저렴하고 즉각적인 의사소통 수단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즉, 인터넷은 새로운 매체(media)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간격을 좁혀주는 역할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전자우편(e-mail)이나 MSN 채팅 서비스와 같은 인터넷의 의사소통 기능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의 방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예전에는 오고 가는데 최소한 2~3일은 걸렸어야 할 공식적인 의사소통조차도 전자우편으로 대체함으로써 거의 실시간으로 교환이 가능해졌고, 채팅이나 네트워크를 통한 의사소통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심리적으로 가까운 사람들과는 언제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 준다. 더구나 무선 인터넷 혹은 모바일 인터넷과 같은 서비스는 우리들로 하여금 언제 어디서든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인터넷 서비스는 이제 어디에나 존재함으로써 그 존재의 특이성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까지 이르고 있다. 그 결과 N 세대라고 불리는 새로운 청소년문화가 등장했다. 차범근 감독이 아들의 행동을 보며 느낀 생경함은 지금 우리나라 기성세대 모두의 경험이다. 그렇다면 실제 인터넷의 어떤 특성이 청소년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며 청소년들은 이 공간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배우고 발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청소년기 심리적 특성이 ‘몰입’ 배경
분명히 우리나라에서 인터넷과 컴퓨터와 게임은 청소년들이 주류를 이루는 영역이다. 인터넷 통계정보 시스템(isis.nic.or.kr)에 의하면 2006년 1월 현재 6세에서 19세 사이의 청소년들은 97% 이상이 최근 한 달간 한번 이상 인터넷을 사용했으나, 이용률은 연령이 높아질수록 줄어들어서 50세 이후부터는 60% 이하로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용시간은 중학생일 때 보다 고등학생 시기에 더 높아졌으며<그림 2>, 이메일은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그림 3>. 여자청소년들은 모바일 통신의 문자메시지를 더 많이 의존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이 이렇게 인터넷에 적극적으로 몰입하는 배경에는 청소년기의 심리적인 특성이 있다. 발달심리학자 에릭슨(Erikson)에 의하면, 자아정체감의 문제는 청소년기에 이르러 차츰 의식적 수준으로 떠오른다. 청소년기를 심리적 유예기(psycholog-ical moratorium)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심리적인 특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청년기의 신체성숙과 성적 발달은 신체에 대한 강한 자의식을 불러 일으켜서 신체적 변화로 달라진 자신의 모습으로 인한 자아개념의 혼란이 일어난다.
둘째, 청년기의 인지 능력의 성숙은 추상적 개념을 사고할 수 있게 하는데, 이는 자신의 내면세계까지 바라볼 수 있게 하여 개인의 역할, 성격, 능력, 그리고 가능성 등을 탐색하고 가치관이나 도덕, 신념 등에 대한 탐색을 가능하게 하여 현실적인 자신과 이상 간의 괴리를 발견하고 고민하게 된다. 셋째, 사회적 관계망이 확대되어 이전보다 훨씬 넓어진 세상과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는데, 이는 동시에 청년들에게 요구되는 역할의 확대를 의미한다. 그들을 ‘주변인(marginal man)’ 이라고 하듯이 상충된 역할 요구에 직면하고 자신에 대한 모호성에 빠진다.
넷째,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고 자신의 판단기준에 참조가 되어왔던 아동기 때의 동일시 대상의 가치가 그 효용성을 상실하면서 자신에 대해 심각하게 고뇌하게 된다. 다섯째, 현대사회는 예전과는 달리 다양한 삶의 방법을 보여주며, 유한한 기회를 가진 우리는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정체감의 위기가 심화된다. 특히 자신이 앞으로 어른이 되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두려움, 다시 말해 ‘역할전망’에 대한 두려움은 청소년들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게 만든다.
일단 현재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앞으로 뭘 할 수 있을지도 판단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정체감의 위기는 인생살이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각되는데, 현대사회는 너무나도 다양한 인생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많아지고 그래서 갈등도 더 심해진다. 이런 이유로 청소년들은 어떻게든 현재 자신의 모습을 확인해야 한다.
자신들만의 세계 만드는 집단정체성
정체감을 확립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은 바로 ‘집단정체성’(Group identity)을 형성하는 것이다. 집단정체성이란 심리 / 사회적 정체감(psychoso-cial identity)으로 개인이 속한 집단에 대한 소속감 또는 일체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나는 연대생이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등과 같이 집단 단위로 유지되는 ‘집단적 정체의식’이다. 언제나 청소년들은 부모세대와는 분리된 공간에서 자기들만의 집단정체성을 형성하고자 한다. 이때 기성세대가 잘 모르거나 불온시하거나 금지하려고 하는 대상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기성세대가 이런 거부감을 보이는 대상은 바로 청소년들에게는 자신들의 집단정체성을 경계 지을 수 있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헤비메탈, 록음악이 이런 집단정체성의 경계선 역할을 했다. 청소년들이 즐기는 음악이 갈수록 험악하고 선정적이 되어갔던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기성세대가 거부반응을 보이기 때문이었다(Lull, 1987). 그리고 21세기인 현재 우리나라에서 청소년들의 집단정체성을 경계 짓는 역할은 인터넷과 컴퓨터게임이 담당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인터넷에 접속해 들어가 부모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공간에서 기성세대가 알아듣지 못하는 통신어나 외계어를 이용하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만의 집단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이버 공간 집단정체성의 세계에서도 다양한 갈등과 공격행동이 나타난다. 특히 사이버공간은 물리적인 위협이 없는 상상의 공간이기 때문에 현실공간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극단적인 행동이 부각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아직까지도 이 사이버 공간의 공동체를 무차별적으로 일어나는 타인 비방이나 공격 행동, 음란물의 유통, 그리고 자살 사이트와 폭탄 사이트 등으로 대표되는 위험한 무엇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같은 이유로 일부에서는 청소년들의 가상공동체 형성과 자기들만의 사이버 문화 형성을 어떻게든 규제하거나 금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단지 인터넷이나 컴퓨터게임이 청소년들과 기성세대 간의 세대격차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기성세대로 하여금 청소년들의 행동과 심리에 대해서 새로운 걱정을 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 걱정은 보통 인터넷 중독, 혹은 게임중독으로 불린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새로운 기술 시대를 따라잡지 못해 전문가의 위치와 통제력을 상실한 기성세대와 오히려 이 새로운 세계에서 주도권을 잡은 청소년들의 역할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예를 들어, 이제 부모는 자녀가 켜고 들여다보고 있는 컴퓨터의 모니터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해서 두렵다. 비명과 선혈이 낭자한 화면 앞에서 격렬하게 게임에 몰입하던 자녀 때문에 걱정하는 부모도 많다. 게임하면서는 화를 내던 자녀가 다음 순간에 누군가와 채팅을 하면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볼 때는 안심이 되다가도 더욱더 불안해진다. 도대체 그 안에 뭐가 있기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화내다가 웃기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정말로 내 자녀가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된다. 그리고 이런 걱정은 자녀가 지금 당장 완수해야 하는 학업 문제와 만나면서 냉엄한 현실이 된다. 컴퓨터로 무엇인가를 하느라고 공부를 못하게 된 자녀들을 데리고 인터넷 중독 상담센터에 찾아오는 부모들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PAGE BREAK]
충분한 이해 없는 개입은 부작용 낳아
좀 더 구체적으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평범한 청소년들이 인터넷과 컴퓨터게임에 몰입하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또래 문화 : 모든 인간에게는 남이 한 일을 따라하려는 동조경향이 있다. 그런데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이 경향이 특히나 더 심하다. 주변 친구들이 하는 활동에 함께 참여하려는 욕구는 결국 또래문화에 동조하려는 경향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또래 문화가 바뀌면 놀이도 바뀐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2) 역할놀이의 본능 : 고프만 등에 의하면 우리는 일종의 배우들이다. 우리가 일하거나 공부하는 배경은 심리적으로는 연극 무대에 가깝다. 현재 나의 무대와 무대, 대본과 대본을 구분하는 능력은 기본이고 말이다. N 세대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역할놀이를 통해서 이런 무대와 대본, 그리고 각자의 역할을 숙지한다.
3) 암묵적인 사회적 암시 : 해리스(Harris)의 연구에 의하면 청소년들은 언제나 자기가 접하는 것들 중에서 첨단의 활동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런 활동일수록 앞으로 자신이 성인이 되었을 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임을 본능적으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활동일수록 기성세대가 잘 모르거나 두려워할 가능성이 높으며 청년들에게는 집단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게 만드는 뚜렷한 표지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청소년들이 기성세대와 다른 사고 다른 행동을 하고 다른 문화를 형성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있었던 정상적인 발달과정임을 알 수 있다. 단지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이 인터넷과 게임이라는 최첨단 기술영역을 배경으로 일어나면서 더 눈에 많이 띄고 있을 뿐이다.
사이버 공간의 청소년문화를 충분히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개입은 충분한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온라인 게시판에서의 욕설사용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욕설 금지장치를 피하기 위해서 청소년들은 욕설의 철자를 변형했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통신어를 만들게 되었다. 즉, 사이버 공간을 정화하기 위한 개입이 오히려 사이버 공간을 예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변화시킨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인터넷, 게임은 청소년 이해의 열쇠
내가 두리에게 배우는 게 하나 있다. 언젠가 자전적인 글에도 썼던 적이 있지만 ‘남의 행복이 커진다고 내 행복이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이 녀석은 항상 여유가 있다. 늘 최고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남을 인정하는 여유가 없는 나에 비해 두리는 동료를 인정하는 여유가 있다. 부럽다. 그리고 이런 세상을 그들에게 물려준 우리 세대가 자랑스럽다. - 앞의 칼럼에서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언제나 청소년들은 부모세대와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을 해왔다. 부모가 자녀의 마음과 행동을 통제하고 원하는 대로 길러낼 수 있다는 생각은 사실상 환상이었다. 부모는 언제나 자녀가 자신의 일부이며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 자녀를 가장 잘 알고 통제한다고 오해해왔고, 뒤늦게 달라진 자녀의 몸과 마음을 발견하고는 놀라곤 했다. 컴퓨터가 없던 필자의 청소년 시절에도 우리 또래 친구들은 독서실 간다고 하고는 오락실에 가는 것처럼 언제나 부모나 선생님 몰래 자기들만의 활동을 해왔다.
발달심리학자 해리스(J.R. Harris)는 이러한 또래 문화야 말로 새로운 세대가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만약에 일반적으로 부모가 꿈꾸는 것처럼 친구들보다는 자기 부모와 더 말이 잘 통하고 자기 부모와 일치하는 가치와 행동방식을 습득한 자녀가 있다고 치자. 그 아이가 과연 어른이 되어서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마주친 세계는 부모가 살았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의 가치와 행동방식은 그들이 살아야 했던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자녀들이 살아야 하는 세계가 기성세대의 그것과 같지 않다면, 자녀들은 부모보다는 자기들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자기 또래에 더 주목을 하고 그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사이버 공간은 청소년들을 더 안전한 곳에서 더 쉽게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일 수 있다. 예전에 청소년들은 자기들만의 문화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 분리된 공간을 필요로 했다. 그것은 으슥한 공터나 폐건물이거나 산 속이 되기도 했다. 이런 공간에서 이들은 실제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꿈을 검증했고 그 결과 매우 많은 사고 위험에 노출되어야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중요한 타인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연결된 지금, 청소년들은 자기들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으슥한 공터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인터넷 속의 게시판이나 온라인 게임이 바로 그 공간이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안전한 자기 방에 앉아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자기들만의 문화를 만들고 자기 신체를 사용할 필요 없이 아바타를 통해서 안전하게 자신의 꿈을 실험할 수 있다. 그 결과 인터넷을 통해서 청소년들은 안전해졌지만 부모가 체감하는 자녀의 위험은 더 커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예전에 부모가 자녀의 활동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들만의 공간을 찾아가야 했다. 실제로 자기 자녀가 자기들만의 공간에서 무슨 일을 하는 지를 볼 수 있었던 부모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그 결과 부모들은 자기 자녀가 어디서든 집에서와 똑같이 조용하고 얌전할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오해에 기반을 둔 안심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인터넷을 통해서 앉은 자리에서 자기들의 공간을 경험하는 청소년들은 부모에게 예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부모는 자기 자녀가 자기가 아는 익숙한 모습뿐만 아니라 더 다양하고 극단적인 모습까지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컴퓨터와 인터넷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제 드러난 것일 뿐, 예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청소년들의 행동방식은 기성세대와 다르고 그들이 활동하는 공간도 다르다. 그러나 이것은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이다. 변하지 않은 것은 또 있다. 기성세대와 다른 자기를 만들고자 하면서도 기성세대로부터 충고와 조언을 필요로 하고, 기성세대가 제공하는 언제든 돌아갈 곳을 믿고서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는 청소년의 심리는 변하지 않았다. 차이가 드러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분명하게 서로의 다름을 확인할 수 있고 그 결과 소통의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고 할 수도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 청소년 자녀가 무슨 게임을 좋아하는지 주로 어떤 사이트에서 활동하는지만 알면 자녀와 소통할 수 있는 확고한 통로를 마련할 수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