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같은 실제 교사의 고군분투
사람들은 어떤 극적인 사건을 접할 때 흔히 '이건 마치 영화 같은데!'라고 말한다. 하지만 살다보면 극적인 사건을 가상하여 만든 영화보다 현실이 더 극적일 때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새삼 놀라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영화 <코치 카터>가 다룬 1999년 미국 리치몬드 고등학교의 체육관 폐쇄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농구부 코치 '겐 카터'가 학생들의 성적 미달을 이유로 당시 연전연승하고 있던 팀의 훈련은 물론 경기까지 포기하고, 아예 체육관마저 폐쇄시켰다. 낙후된 지역에서 유일한 성공의 희망을 농구에서 발견해 왔던 선수들은 물론 그들의 부모, 그리고 이들의 승리에 고무되어 있던 지역 주민들은 당연히 이 극단적 조치에 격렬히 항의하는 등 일대 물의가 빚어지게 되었고, 이 사건은 언론에 의해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된다.
영화 <코치 카터>는 연전연패하던 쇠락의 빛이 역력한 리치몬드 고교에 카터가 부임하면서 시작한다. 그가 처음 학교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한 일은 선수들과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농구를 계속하고 싶다면 최소한 C정도의 성적 이상을 올리고 수업에 들어가 앞자리에 앉으며, 시합에 나갈 때 셔츠와 타이를 착용하라는 것이다.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카터의 탁월한 리더십과 지독하리만큼 철저한 훈련은 오합지졸과 같았던 농구팀을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고, 이후 경기에서 연승행진을 계속한다. 가망 없는 선수들, 천재적인 교사의 헌신적 노력 그리고 성공과 승리라는 다소 전형적인 장르 영화의 맥락을 따르던 영화는 선수들 대부분이 형편없는 학업 성적을 올리면서 전형의 궤를 이탈하기 시작한다.
경기에서의 승패와 관계없이 계약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자 카터는 망설임 없이 체육관 문을 닫는다. 그리고 선수이기 이전에 학생인 아이들에게 농구 연습 못지않은 강도의 집중적인 학습을 요구한다. 그는 이러한 결정을 극단적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을 향해 말한다. 만약 아이들이 자신이 정한 이 간단한 규칙조차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들은 결국 그 어떠한 규범이나 질서도 존중하지 않는 이들로 전락할 것이라고…. 그래서 결국 그런 주위의 무수한 범죄자들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동시에 카터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생들에게 인생에는 농구 이상의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하며, 노력하는 자는 누구나 그 가능성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수단이 아닌 가능성을 위한 교육
흔히 교육을 전인교육이라 한다. 온전한 교육이란 단지 인성의 일부분이나 혹은 가능성 있는 특정 기능만을 훈련하고 발달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말 그대로 생각과 마음 그리고 의지 모두가 온전한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모든 부분을 균형 있게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전인교육'의 기치가 허공에 외치는 소리처럼 여겨진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오직 대학 입시만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는 학교교육의 문제점은 수십 년 전부터 지적되어 왔지만 여전히 해결의 기미를 찾아 볼 수 없다. 작은 전쟁터로 변한 교육 현장에서 교육의 세 주체, 곧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는 모두 오직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목과 방법론에만 매달리고 있거나, 혹은 매달리기를 요구받고 있다.
리치몬드 고교 농구부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오직 농구만 잘하기를, 그래서 경기에 승리하여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해 주기를 열광적으로 바란다. 관객들은 어린 농구 선수들의 성적이나 이들의 보다 먼 미래 삶에 있을 가능성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이겨주기를 바랄 뿐이다. 마치 아이의 생각과 정서와 의지가 어떻게 발달하든 말든 일단 좋은 대학에 어떻게든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코치 카터는 이를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 농구는 수단일 뿐이다. 보다 나은 삶을 향한 하나의 작은 조건 말이다. 그는 아이들이 단지 농구만 아는 단순한 기능인이 아닌 스스로 사고하고 바른 선택과 결정을 할 줄 아는, 그래서 농구 이상의 가능성으로 삶을 가득 채워가는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해 가기를 바랐다.
이런 이유로 카터는 선수들에게 공부할 것을 요구한다. 읽고 쓰고 보고 듣고 말하는 일련의 과정은 대학 진학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의 생각의 폭과 깊이를 더하게 함으로써 종국에는 참된 자신감의 든든한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코치 카터는 몸소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농구하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것이 필요했듯이 우리의 공부만하는 아이들에게는 농구가, 음악과 연극이, 영화와 미술, 철학과 문학이 절실하게 필요한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오직 물질적 성공과 출세만을 최고의 가치로 가르치고, 공부를 단순히 이런 목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만드는 사회의 미래는 참담할 뿐 아니라 암울하다. 얼마 전 인문학 관련 학과 교수들을 중심으로 최근 사회 전반에 걸친 인문학에 대한 '홀대와 무관심'이 결국 진정한 의미나 가치의 토대 없이 다만 물신숭배로 점철되어 가는 한국 사회의 위기를 낳고 있다는 성명이 발표된 바 있다. 이것이 어찌 대학만의 위기요, 문제이겠는가?
갈등을 신뢰와 사랑으로 극복하다
그러나 목적이야 어떠했든 코치 카터의 교육방식은 가혹할 정도로 엄격해 보인다. 자신의 지시에 대한 작은 불이행이나 거부에도 팔 굽혀펴기 500회, 좌우 달리기 1000회를 거침없이 부과한다. 따르지 않는 선수는 가차 없이 팀에서 제외하거나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벌칙을 내린다. 반발과 저항은 예견된 것이었고, 과정 중 몇몇 선수가 팀을 박차고 나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카터의 극단적인 요구를 끝내 선수 자신들은 물론 그들의 학부모 그리고 동료 교사들이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그의 방법론이 가지고 있는 합리성, 곧 충분히 타당한 근거와 분명한 목표를 지니고 있다는 점과 무엇보다 학생들을 전인적인 차원에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카터에게 있어 체벌이란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저지르거나 선택한 어떤 결정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과정을 생략한다면 사회 진출을 앞두고 있는 아이들은 자신이 내뱉는 말 한마디, 매순간 행동하고 선택하는 것들이 삶에 어떤 구체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가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코치 카터의 훈계 방식은 종종 체벌을 비롯한 훈계와 관련하여 학생, 학부모, 교사 사이에 종종 긴장과 갈등이 파생되곤 하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곧 학생 훈육에 있어 본질적인 승패는 체벌의 형식이나 강도와 같은 외적인 부분보다는 학생과 교사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 있느냐 하는 내적인 부분으로 말미암는다는 점이다. 단단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 가운데 있는 사제지간이라면 경우에 따라 코치 카터가 사용한 것 이상의 엄격한 훈계 방식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교사가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사랑의 매'가 아니라 학생 자신이 고백할 수밖에 없는 '사랑의 매'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러한 신뢰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라면 체벌은 고사하고, 야단치는 몇 마디 말만으로도 학생의 마음에 깊은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결국 영화는 행복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비록 천신만고 끝에 올라간 대회에서 아쉽게 패배함으로써 연승행진에 종지부를 찍지만, 이후 코치 카터의 바람대로 선수들 가운데 1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여러 유수의 대학에 진학해 농구는 물론 의대나 경영 등 다양한 전공 영역에 진출하는 등의 쾌거를 이룬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행복한 결말이 영화 속이 아닌 지난 2004년 실제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인생은 때로 영화보다 극적이다.
*영화 정보*
제목 : 코치 카터(coach carter)
감독 : 토머스 카터
출연 : 사무엘 L. 잭슨, 롭 브라운
제작년도 : 2005년
관람등급 :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