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말, 숨은 마음

2007.10.01 09:00:00

사람의 뜻과 마음을 전하고 알아차리는 일은 여간 섬세하고 그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종 드러낸 말의 저 깊은 심층을 소리도 없이 모양도 없이 흘러간다. 다만 은은한 향기를 스칠 듯 말 듯 오래 마음의 자취에 남긴다. 그러니 드러내지 않은 말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소중하기 그지없는 말은 밖으로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법인지도 모른다.


로 야구 원년부터 활약하여, 프로 야구 초창기 아주 잘 나갔던 선수 중에 OB 베어스의 신경식 선수가 있다. 188㎝의 큰 키에 시원한 장타를 날리고, 학 다리처럼 긴 다리를 벋어 1루 수비를 멋있게 해내던 그의 모습은 지금도 인상적이다. OB 베어스 팬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야구를 좋아하는 일반 대중들로부터 폭넓은 사랑을 받던 선수였다. 그가 선수로 한창 기량을 발휘하던 무렵, 어느 자리에서인가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신경식은 어려서부터 야구에 재능을 발휘하여 초·중학교시절부터 야구 선수로 뽑혀 활약을 하였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집에서는 제대로 뒷바라지를 해 주지 못했다고 한다. 어려운 살림에 이런저런 고생을 하던 그의 어머니는 시골에서 닭을 길러 계란을 모으면, 그걸 장날에는 머리에 이고 가서, 장에 내어 팔아 가계를 꾸렸단다. 운동하는 아들을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사뭇 안타깝고 아쉬웠을 것이다. 그 살림에 고기를 사 먹이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단다. 장에 내다 팔아야 하므로 계란조차도 제대로 마음 놓고 먹일 형편이 아니었다. 또한 형편이 괜찮다고 한들, 이미 검약의 정신이 몸에 배어 있는 어머니로서는 아끼고 절제하는 가르침을 강조하였단다. 

신경식 선수가 소년 야구선수로서 지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올 무렵이면, 어머니는 계란을 담거나 나르다가 실수로 종종 깨뜨리는 일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이쿠 내가 한눈을 팔다가 이 아까운 것을 또 깨어 버렸구나” 하고서는 깨진 계란들을 얼른 수습을 하시고는, 그걸로 계란찜을 해내거나, 계란탕으로 만들어 아들에게 먹도록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꼭 있었단다.

“양계장에 모아 놓은 계란은 장에 갖다 팔아야 하는 것이니 절대로 손댈 수 없고, 이건 어차피 내다 팔 수 없게 된 계란이니 이렇게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계란이 깨어진 것은 안 된 일이지만, 이렇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잘 된 일이다.”


그런데 이제 어른이 된 신경식선수의 고백은 어머니의 숨은 마음을 헤아리는 데로 이어진다. 어머님은 실수로 계란을 깨트린 것이 아니라, 일부러 깨뜨린 것이라는 고백을 한다. 짐짓 실수인 척하시면서 사실은 알고서 깨뜨린 것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어머니의 실수인가 보다 했지만, 나이 들어서 그 시절의 정황을 되짚어 보고, 어머니의 성품과 사랑을 다시 반추해 보니 어머니의 행동과 말씀에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깊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겠더라고 했다. 

가난한 살림을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는 어머니는 운동하는 아들을 제대로 먹이고 싶은 마음과 절약의 현실을 아들이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동시에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 사이에서 이런 행동과 이런 언어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정작으로 그의 어머니가 아들 신경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수로 깨뜨렸다는 둥, 깨어진 것이니까 너를 먹도록 허락해 준다는 둥 하는 말들은 어머니가 짐짓 아닌 척 하며, 그저 표면으로 내세우는 말들이다. 어려운 살림의 현실 속에서 아들을 사랑하는 어미의 마음은 소중하게 안으로 안으로 숨어서 쉽사리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겉으로 드러낸 말들은 안으로 숨어 있는 소중한 마음들을 보호하고 간직하기 위한 장치들에 불과한지 모르겠다. 

어머니의 그런 마음을 마침내 읽어낸 아들의 추억담을 들으면서 우리는 작고 아름다운 감동을 경험한다. 그러하니 말이 주는 감동이란 말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마음과 말의 조화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사적(修辭的) 감동이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은 그 화려함이나 당당한 표출만으로 얻어지지 아니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게 된다. 오히려 진정한 마음을 꼭꼭 숨기어 보전하는 데서 감동이 긴 여운을 가지고 생겨난다. 이런 감동은 다시 다른 말로 드러내어 응답하는 것도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상대의 소중하고 깊은 마음의 배려를 받았을 때, 그것을 뒤늦게 감동과 더불어 발견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말을 하지 그랬어. 나는 전혀 몰랐잖아!” 

어딘가 즉흥적이고 호들갑을 떠는 방식으로 호응한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보니 어딘가 상투적이고 공허한 반응임을 느낀다. 배려는 배려로 이어짐이 좋다. 이쪽 또한 드러내지 않는 말로써 내 소중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차분한 자세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사람살이가 남들과 어우러져 되는 것이니, 모두 말로써 이루어진다. 말을 해야 서로 뜻을 헤아려 알아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은 하라고 있는 것이다. 우는 아이 젖 준다는 말도, 말 안하면 손해라는 의식이 담긴 말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뜻이 높아도 말로 드러내지 아니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목에 핏대 세워 하는 말도 알아듣기 힘든데, 드러내지 않는 말을 무슨 재주로 이해하란 말인가. 얼핏 그렇게도 생각된다. 그러나 말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말을 이 정도로 이해하고 말아 버린다면, 그 얼마나 삭막한 사람살이가 될까. 드러내는 말, 그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말의 세계가 얼마나 오묘한지를 모른다면, 그 또한 사람살이의 진면목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뜻과 마음을 전하고 알아차리는 일은 여간 섬세하고 그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종 드러낸 말의 저 깊은 심층을 소리도 없이 모양도 없이 흘러간다. 다만 은은한 향기를 스칠 듯 말 듯 오래 마음의 자취에 남긴다. 그러니 드러내지 않은 말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먼저 그 사람의 마음을 본 연후에 그 사람의 말을 보면 드러내지 아니하는 말이 보인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참으로 오묘하고 신통한 것이어서 깊고 소중한 뜻일수록 쉽사리 말의 굴레에 갇히지 아니한다. 오히려 드러내는 말로부터 멀찌감치 물러서 있거나 숨으려 드는 것이다. 이런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가에서 일찍이 ‘관음(觀音)’이란 것이 있었다. 글자 뜻 그대로는 ‘소리를 본다’는 뜻이니, 소리는 듣는 것인 줄만 알고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좀 생소한 개념이다. 불가의 관음법문은 즉각적인 깨달음과 영원한 해탈을 보장하는 일종의 명상법이라고 하는데, 현대적 개념으로 말하면 높고 고매한 경지의 의사전달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관음(觀音)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빛과 소리의 진동을 명상하는 방법이라 한다. 그런데 이 내면의 빛과 소리는 육체의 눈과 귀로는 들을 수 없으며, 언어와 두뇌를 초월한다고 한다. 불가에서는 지혜의 눈을 열게 됨으로써 이 내면의 빛과 소리를 즉시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드러내지 않는 말’로 가장 소중한 의사전달을 부지불식간에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는 분명 인생의 달고 쓴 맛을 다 본 뒤에 얻을 수 있는 현자의 지혜를 지닌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그 ‘지혜’란 것이 위대하고 고상한 철인(哲人)에게서만 찾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를 정성으로 아끼시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찾은 자의 행복이다. 진정한 우정의 친구가 보내주는 마음의 배려 또한 그 대부분은 ‘드러내지 않았던 말’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이 또한 그것을 발견한 자의 기쁨이다. 요컨대 상대의 ‘드러내지 않았던 말’이 지닌 소중한 메시지를 마침내 알아차리고야 마는 우리들 자신의 내적 성숙이 중요한 것이다. 나 같은 세속의 사람들에게 ‘관음(觀音)’의 경험이 달리 있겠는가. 상대가 나를 진정으로 위하여 ‘드러내지 않았던 말’, 그 말의 틈새에 숨어 있었던 간절함의 의미를 내가 마침내 발견하여 떨리는 감동을 느꼈다면, 그것이 곧 ‘관음(觀音)의 경지’ 아니겠는가.

소중하기 그지없는 말은 밖으로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법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말의 본성인 동시에 마음의 본성인지 모른다. 극진한 사랑의 감정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는 젊은 영혼들의 고백들이 왜 존재하겠는가. 김소월의 시 ‘초혼(招魂)’에서 우리는 그런 말의 모습과 마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끝내 하지 못하였던 말에 가장 깊은 영혼의 목소리가 거하고 있는 것 아닐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이 구절을 다시 읽으면서, 말이 존재하는 궁극의 자리는 과연 어디인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드러내지 않은 말,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는 말,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숨은 신(神)이 거하는 곳이 아닐는지.

박인기 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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