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나 어른이나

2007.12.01 09:00:00

“선생님이 예뻐? 옆 반 선생님이 예뻐?”유치원 꼬마들의 ‘선생님의 말씀 중 듣기 싫은 말’ 중 하나다. 유치원 꼬마들의 지적이지만, 무릎을 칠 정도로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이는 그냥 어른들만의 유쾌한 놀이일 뿐 아이에게는 고통의 시간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유치원 꼬마들만의 괴로움이고 고민이겠는가. 어른들의 세계인들 다를 리가 없다. 줄서기를 강요하는 사회, 어떤 권력의 줄을 따라야 할지 고민하게 하는 사회, 한번 줄을 잘못 서면, 아득하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불안은 정치판에도 장사판에도, 심지어 교육판에도 없다 하지 못할 것이다.


억날지 모르겠지만 모 방송사의 인기 프로그램 중에 <전파견문록>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유치원 어린이들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인데, 막상 이 프로그램은 유치원 어린이 프로그램이 아니라, 일반 어른들이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를테면 유치원 어린이들을 끌어들인 일종의 오락 프로그램인 셈이다. 두 팀의 연예인들이 유치원 어린이들을 상대로 그들의 숨어 있는 마음과 언어를 누가 더 잘 알아맞히는지를 경쟁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유치원 어린이를 두고 양 팀의 대결이 게임하듯이 전개되기 때문에, 오락적 흥미가 높았다. 동시에 유치원 어린이의 순수하고 꾸밈없는 마음과 언어를 감동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던 프로그램이다. 꼬마들의 말과 생각을 통해서 어른들의 때 묻은 속기(俗氣)를 매우 산뜻하게 반성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교양성’이 강한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이 방송 프로그램이 크게 인기를 얻게 된 데에는, 제작진이 전문성을 가지고 유치원 어린이들을 상대로 다양하고도 현실감 있는 조사를 계속하고, 그것을 프로그램 제작에 유효적절하게 반영시켰던 데에 있었다.
그 조사 중에 두고두고 흥미와 관심을 끌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유치원 어린이 여러분! 선생님 말씀 중에 제일 듣기 싫은 것은 무엇인지 말 좀 해 보세요’하는 물음에 대해서 아이들이 반응한 내용이었다. 천여 명의 유치원 아이들이 보여 준 반응 중에 1위에서 4위까지를 선정하여 발표하였다.

먼저 4위부터 보자. 듣기 싫은 선생님의 말씀, 제4위에 올라 와 있는 유치원 아이들의 반응은 이거다.
“선생님이 예뻐? 옆 반 선생님이 예뻐?”
유치원 꼬마들이 지적한 것이지만, 무릎을 칠 정도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어른 중심(가부장 중심)의 전근대적 가치관 하에서는 아이들의 인격은 쉽게 무시되었다. 겨우 말을 시작할 무렵부터 가장 자주 들었던 물음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물음 아니었던가. ‘아빠가 좋아’라고 하면 짐짓 엄마가 찡그리는 척하고, ‘엄마가 좋아’라고 하면 짐짓 아빠가 찡그리는 척하는 모습으로 가족의 단란함을 과시하였다. 아이가 곤혹스러워 하면, 어른들은 곧잘 “그 놈 참 영리하다”고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어른들만의 유쾌한 놀이일 뿐이다. 아이에게는 그저 고통의 시간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유치원 꼬마들만의 괴로움이고 고민이겠는가. 어른들의 세계인들 다를 리가 없다. 줄서기를 강요하는 사회, 어떤 권력의 줄을 따라야 할지 고민하게 하는 사회, 아차, 한번 줄을 잘못 서면, 아득하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불안은 정치판에도 장사판에도, 심지어 교육판에도 없다 하지 못할 것이다. 힘없고 불안정한 직장인들에게는 줄서기처럼 곤혹스러운 것이 없다. 힘을 가진 쪽에서는 심심풀이로 묻는 말일 수도 있지만, 당하는 쪽에서는 더없는 마음의 갈등과 눈치 보기의 곡예를 해야 한다. 그래서 억압이다.
줄 서기를 강요하는 사회는 ‘편 가르기’가 극성을 피우는 사회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심리 내면에 ‘편 가르기’에 대한 악마적 유혹이 본래부터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편 가르기’란 권력을 공학적으로 주무를 수 있는 자들이 내 권력 만들기를 위해 가동하는 풀무질과도 같은 것이다. 생각해 보라. 내 마음 어딘가에 편 가르기를 하고 싶은 유혹이 생기면, ‘아, 내가 권력 지향의 유혹에 이끌려가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 된다.
“선생님이 예뻐? 옆 반 선생님이 예뻐?” 억압의 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른이나 아이나 이 대목에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선생님 말씀 중 가장 듣기 싫은 말, 제 3위에 올라 있는 말은 짧고도 명료하다.
“너 말고 !”
“저요, 저요”하고 손을 드는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무슨 사유인지는 모르지만 선생님께서 어떤 아이를 제쳐놓음을 선언할 때 하는 말이, 바로 ‘너 말고!’ 아니겠는가. 선생님도 사정은 있을 것이다. 그 아이가 아마 여러 번 발표를 독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표출된 말의 모습이 너무도 단호한 차단이다. 설령 그 아이의 참여를 억제시킬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좀더 부드러운 제어의 말은 없을까. 아무런 어루만짐의 배려도 없이 냉정히 선고하듯 투사하는 ‘너 말고!’라는 말은 너무 직선적이고 강렬해서, 그 말을 받는 아이에게는 ‘너 싫어!’라는 말로 전해오기 십상이다. 그만큼 마음에 입게 되는 상처도 쓰리고 아프다.
어른들도 사회생활에서, 여러 수십 번 ‘너 말고!’를 경험한다. 그러면서 그 자신도 또 다른 그 누구를 향하여 ‘너 말고!’를 외친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만드는 것이 현대 사회라고 한다. 오늘날 가장 큰 병리 현상이 ‘소외의 현상’이라고 하지 않는가. 소외가 뼈저리게 느껴지는 것은, 자기네들끼리 무어라고 신나게 떠들다가 내가 들어갔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게 되는 상황을 경험할 때이다. 이런 상황이 ‘존재의 감옥’이라 할 수 있다.
직장이나 공동체에서 나만 따돌림을 받는다는 느낌을 가지는 순간, 사람들과 아득하게 격리되는 자아를 가지게 된다. 그 순간이 바로 ‘존재의 감옥’으로 가게 되는 순간인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 아니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버리는 환경이 바로 소외의 본질이다. 소외는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냄새도 아무런 색깔도 없는 새로운 종류의 억압이다. 소리 소문도 없이 나를 낙오시키는 것이다. 저항할 기력 자체를 빼앗아 가버리는, 그런 억압이다. 어른이나 아이나 이런 소외의 언어에 억압되고 있다.

유치원 꼬마들이 선생님에게서 듣기 싫어하는 랭킹 2위의 말은, 사실 우리들 모두가 어떤 식으로이든 자라면서 경험했던 말이다.
“너 이렇게 말 안 듣는 것, 원장 선생님께 모두 일러바쳐야겠다.”
어떤가. 이 억울하기도 하고, 대책 없기도 한 막막함의 상황을 누가 알겠는가. 진정 나는 그런 ‘나’가 아닌데, 원장 선생님께서는 순전히 나쁜 아이로만 나를 인식할 것 아니겠는가. 나는 어떻게 변명조차 해 볼 수도 없고, 나란 존재는 속절없이 왜곡되고 만다. 이렇게 무기력하고, 이렇게 부자유한 것이 또 있을까. 아, 나도 일러바칠 수 있는 자리에 있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 보면 일러바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권력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때로 최고 권력보다도 더 권력스럽다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물론 그런 권력은 부당한 권력이다. 부당한 권력은 언제나 권력을 남용한다.
권력자에게 누군가의 잘못을 일러바치는 심리에는 미움과 견제의 감정이 개입한다. 아니, 모든 일러바침의 속에는 확장된 미움의 감정이 스며있다. 일러바치는 본인은 그것을 ‘정의감’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최면을 걸지만,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있는 미움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다. 잘못된 것을 교정해 주는 방법 중에 가장 야비한 것이 누군가에게 일러바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다. 그렇게 일러바치겠다고 은연중에 위협하는 것은 막상 일러바침 그 자체보다 더 고약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별다른 대응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휘둘러지는 일러바침의 집중은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흔히 드러난다.
“너 이렇게 말 안 듣는 것, 원장 선생님께 모두 일러바쳐야겠다”는 엄청난 억압임에 틀림없다. 이런 식으로 억압을 받는 아이는 자율을 버린다. 내 나름대로 잘 해보았자 일러바친 대로 이미 나는 찍힌 몸이 되는 걸 알면서 절망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율을 버린다. 타율적 인간이 된다. 아이들만 그런가? 어른도 꼭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대망의 1위, 유치원 아이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선생님의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재의 위치에서 내쫓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담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안 되겠다. 다시 여섯 살 반으로 내려가야 하겠다.”
유치원은 두 개의 학년으로 되어 있다. 여섯 살 반과 일곱 살 반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위의 반응은 일곱 살 반 어린이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예닐곱 살 무렵의 여섯 살과 일곱 살은 엄청난 발달상의 차이를 가지는 때이다.
여섯 살 반으로 내려 보내겠다는 선생님 말씀을 듣는 순간 형용 못할 당혹감과 불안감이 엄습한다. 아무리 못하기로서니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저 코흘리개 동생들 반으로 가서 배우라니, 동네에서 내 자존심은 어떻게 되는 거냐 말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 이 반에서 나만 쫓겨나는 것은 너무 억울하고 분하다. 나보다 더 못한 영철이도 있고 예림이도 있는데, 왜 날더러 나가라고 한단 말인가. 또 그건 그렇다 치고, 그간 친구들 열심히 사귀어 정도 들고 분위기도 익숙해져서, 어른들 말로 정체감과 안정감을 가지고 공부해 왔었는데 갑자기 나가라니. 해도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분노와 불안이 뒤섞이니 세상이 우울하고 밥맛도 없어진다.
유치원 꼬마들의 마음을 여기까지 따라오다 보니, 매우 유사한 것 하나를 발견한다. 구조조정과 퇴출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우울해 하는 어른들의 마음이 이것과 꼭 닮았다. 근원도 알 수 없고 출구는 더욱 알 수 없는 퇴출과 구조조정의 메커니즘, 이보다 더 우울한 억압이 어디에 있겠는가. 인생고해(人生苦海)는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 고단하게 건너야 하는 바다인가.
박인기 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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