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꿈은 계속 된다

2010.09.01 09:00:00


전국시대의 사상가 장자(莊子)가 하루는 낮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나비가 되어 꽃들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니며 자유로운 비행(飛行)을 만끽했다. 그는 잠시 쉬려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는데, 문득 깨어보니 다시 인간이 되어 있었다. 장자는 고민에 빠졌다.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도대체 그 사이에 어떤 다름이 있는 것인가?’ 도대체 본래 인간이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본래 나비가 꿈속에서 인간이 되어 이렇게 있는 것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것. 바로 이것이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호접지몽(胡蝶之夢)’ 일화이다. 그에 따르면 둘 사이에는 피상적인 차이는 있어도 절대적인 변화는 없다. 자신이 곧 나비이고, 나비가 곧 장자라는 경지, 이것이 바로 그가 파악한 물아(物我)의 구별이 없는 만물일체의 절대경지로서의 세계의 모습이다.

무대예술의 꽃인 오페라와 뮤지컬에서도 각각 시대를 초월해 이루지 못한 나비의 날갯짓을 주제로 한 명작이 있다. 먼저 오페라 <나비부인>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일본 여인 초초상이다. 그녀는 한때 권세 있는 집안 출신이었지만 가세가 기운 후 게이샤가 되었다. 그녀의 애칭은 바로 ‘나비(초초)’이다. 기모노를 차려입은 열다섯 소녀의 고운 자태를 표현하기에 그보다 적합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장자가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았듯이 초초상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호접지몽은 쉽게 꺾일 수밖에 없었던 허무한 인생을 상징한다. 결국 초초상은 냉혹한 현실과 순수한 사랑 사이의 괴리를 이기지 못하고 자결함으로써 영원히 꿈꾸는 길을 택한다. 그녀의 ‘나비의 꿈’은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여주인공 킴에게 고스란히 전이되었다.

나비부인 VS 미스 사이공

<나비부인>(Madame Butterfly)은 <라보엠>과 <토스카>를 작곡한 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의 후속작으로, 루이지 일리카와 주세페 지아코사가 이탈리아어 대본을 써 1904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한 2막 오페라이다. 이 오페라는 당시 서구에 불어 닥친 소위 ‘일본풍’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작품이기도 하다. 1887년경의 일본 나가사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집을 무대로 하고, 미국 해군장교 핑커튼과 나비부인의 결혼으로부터 그녀의 비극적인 자살에 이르기까지를 엮었다. 원작은 존 루터 롱이 일본 나가사키의 한 여인의 실화에 관해 쓴 동명의 단편소설이고 이를 미국의 프로듀서 겸 작가인 데이비드 벨라스코가 연극으로 각색했다. 푸치니는 런던에서 이 연극을 보고 오페라화를 결심했다고 한다.

<나비부인>은 초연 당시 기대 이하의 혹평을 받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오페라의 수많은 레퍼토리 중에서 낯선 동양을 무대로 동양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예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영국 코믹 오페라의 대가인 길버트, 설리번 콤비의 <미카도>(1885)가 있지만 이는 당시 서구에서 유행했던 이국풍(異國風) 선호에 따라 가상의 나라로 일본을 설정했을 뿐이다. <나비부인>과 <투란도트>를 제외하고 아직도 이탈리아 정통 오페라에서 동양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은 찾기 어렵다. 물론 영 · 미권 뮤지컬에서도 동양 소재의 작품은 극히 적다. <미스 사이공>(1989) 이전 작품으로는 리처드 로저스, 오스카 해머스타인 콤비의 소위 ‘동양 3부작’1)이 있다. 여기에 휴 휠러, 스티븐 손드하임이 개항기의 일본 사회를 다룬 <태평양 서곡>(1975) 정도를 추가할 수 있다. <미스 사이공>은 앞서의 모든 작품들보다도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자, 역대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에서 공연된 뮤지컬 중에서도 상위에 드는 장기 흥행작이다. 그 비결은 <나비부인>에서 검증된 기본 스토리 구조와 캐릭터 등을 현대적으로 잘 계승하고 여기에 웅장한 오케스트라 음악과 비주얼 효과를 더해 보편적인 흥행 요소를 만들어낸 데 있다.


<나비부인>의 1막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미국 해군장교 핑카튼과 집안이 몰락해 게이샤가 된 15세의 초초상(나비)의 결혼식이다. 얼마 후 핑카튼은 곧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미국으로 가 버린다. 3년이 지나도 그가 돌아오지 않자 주위 사람들은 야마도리 공작과 재혼할 것을 권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2막에서는 어느 날 핑카튼이 탄 함정이 돌아온다. 나비부인은 그의 아들과 함께 핑카튼을 기다리는데 그는 부인 케이트를 데리고 나타난다. 현실을 직시하게 된 나비부인은 아들을 케이트 부인에게 맡기고 병풍 뒤에서 단도로 자결한다. 이런 기본 스토리 구조는 <미스 사이공>에서 고스란히 적용됐다. 다만 배경에서는 차이가 있는데 오페라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나카사키 항이 일본 개국시대에 가장 먼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화합의 공간이라면 <미스 사이공>의 사이공은 민초들의 삶이 전쟁으로 인해 생지옥으로 변해 문물이 강제로 교합되며 대립각을 세우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아야 하는 다급한 처지에 놓인 킴은 우아한 예술인으로서의 긍지라도 지닌 게이샤 초초상에 비해 훨씬 더 절실한 비상을 꿈꾸지 않을 수 없다.

뮤지컬에서 킴에게 끊임없이 살기 위한 선택을 강요하는 인물로 엔지니어와 투이가 등장한다. 엔지니어는 포주 짓을 하며 번 돈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려는 속물이며 킴의 사촌이자, 정혼자였던 투이는 킴을 되찾기 위해 킴의 아들까지 살해하려는 독한 인물로 묘사된다. 오페라에서는 미군과 일본 여인의 결혼에 앞장서고 소개료를 받아 사는 일본인 중매쟁이 고로가 뮤지컬에서의 엔지니어의 역할이다. 나비부인이 기독교로 개종한 데 대해 화를 내고 저주하는 큰아버지인 승려 본조와 돈 많은 야마도리 공작이 각각 담당하는 친척과 연적이라는 다른 캐릭터는 뮤지컬에서 한 인물인 투이로 합체되어 있다. 아메리칸 드림의 한 축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인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핑커튼의 아량 넓은 아내 케이트 부인은 크리스의 아내 엘렌이 이어받았다. 다만 케이트 부인은 자기가 초초상의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해서 초초상이 자살에 이르게 하지만, 엘렌이 킴에 대한 질투심으로 아이를 데려가지 못한다고 하자 아이를 위해,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던 대상의 부질없음에 절망하며 자살하게 된다는 점이 다르다. 즉, 여주인공이 살려고 하는 공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초상은 일본에서 핑커튼과 살기를 원했고 킴은 미국에서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오페라에서 결혼하는 여자에게 죄를 짓지 말라는 도덕적인 훈계를 하는 미국 영사 샤플리스는 뮤지컬 2막의 존의 캐릭터에 투영된다. 존은 1막에서는 방탕한 미군으로 그려지지만 제대 후 개과천선해 ‘부이도이’(전쟁 당시 베트남 여성과 미군 사이에 태어난 혼혈 아이들)를 위한 재단에서 일한다. 이해심과 배려심이 가득한 두 미국인을 통해 오리엔탈리즘 역시 계승되고 있다.

<미스 사이공>의 런던 초연 당시 가장 큰 화제는 실물 크기의 헬리콥터가 무대 위에 등장하는 생생한 장면이었다. 헬리콥터는 사이공 함락 당시 철수하는 미군을 수송하는 수단으로 킴을 두고 떠나는 크리스의 안타까운 이별 장면을 보여주지만, 이러한 구도는 <나비부인>이 핑카튼이 타고 떠난 백색의 군함 ‘에이브러햄 링컨호’이자, 꿈에서 깨어난 후 멀어져가는 나비에 해당한다. 보다 직접적으로 오페라를 오마주(Hommage)한 부분은 마지막 장면이다. 뮤지컬에서 권총 자살을 한 킴을 발견한 크리스가 킴을 붙잡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자마자 막은 순식간에 내려간다. 이러한 급작스런 엔딩은 뮤지컬에서 거의 유일한데 오페라에서의 같은 방식에 대한 오마주라고 볼 수 있다. 초초상은 핑커튼의 모습을 보자,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가리키면서 숨을 거둔다. 샤플리스는 어린아이를 껴안고 키스하고 핑커튼은 초초상을 잡고 울부짖는다.

두 작품이 여주인공을 통해 공통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정서는 한편으로는 지고지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집착에 가깝기까지 한 외골수적 사랑이다. 꿈속에서는 대지를 훨훨 날았던 나비이건만 현실에서는 ‘자유의 땅’으로 가는 헬리콥터에 타지 못한 불운하고 나약한 인간인 것이다. 두 작품은 자주는 아니지만 우리 무대에서도 볼 수 있다. <나비부인>도 지난봄에 서울에서 공연을 했고, <미스 사이공> 역시 2006년 국내 초연 이후 4년 만에 충무아트홀 대극장에서 9월 12일까지 재공연 한다.
조용신 공연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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