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독설시대

2011.06.01 09:00:00

날카로운 풍자와 재기발랄한 위트를 함께 담고 있는 독설은 강한 마력을 갖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에 열광하며 즐긴다. 그러다 독설에 중독 되기도 한다. 웃고 즐기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독설에 중독되어 몸과 마음이 조금씩 병들게 될지도 모른다


1. 근자 공중파 텔레비전 방송에서 최고의 가수를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유행이다. 아마추어를 대상으로 최고의 가수를 뽑기도 하지만, 기존 가수들을 대상으로 냉혹한 탈락의 굴욕을 안기는 프로그램도 있다.
심지어 어떤 프로그램은 출연자들의 노래 솜씨보다 심사위원의 독설 심사평이 더 대중적 인기를 얻기도 한다. 상업적 기획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방송 프로그램이므로 이러한 독설 효과가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프로그램 마케팅 전략의 한 축으로 삼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예능 프로그램 사회자는 아예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를 독설가로 구축하여 그 나름의 성공을 얻기도 했다.
독설의 전형으로는 작가 ‘버나드 쇼’가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에게 했다는 독설이 우리에게 전해진다. 어느 날 덩컨이 어떤 사교장에서 버나드 쇼에게 말했단다.
“당신과 내가 결혼한다면 아마도 당신을 닮아 머리가 좋고, 나를 닮아서 용모가 수려한 아이가 태어날 것입니다.”
일종의 덕담인 셈이었는데, 이를 받아서 한 ‘버나드 쇼’의 말이 수준급 독설이었다. 잘난 척하는 덩컨을 놀려줄 셈이었을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을 닮아서 머리는 비고, 나를 닮아서 얼굴이 못 생긴 아이가 태어날지도 모릅니다.”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독설이란 무릇 날카로운 풍자와 재기발랄한 위트의 일면을 담아야 함을 보여주는 것임을 확인케 하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아무리 독설이라도 일종의 품격을 살려야 함도 보여준다. 버나드 쇼는 덩컨에게 머리가 나쁘다는 독설을 던지면서, 자신도 못생긴 사람이라는 것을 슬쩍 끼워 넣는다. 그래서 더 얄밉다는 인상이 드는 교묘한 독설로 격을 높여 버린다. 호의의 유머성 제안을 독설로 돌려 준 쇼에게 덩컨이 모욕을 느꼈을지, 아니면 더 진한 매력을 느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독설의 사전적인 뜻은 독한 기운을 뿜어내면서 상대를 비난하고 저주하는 말이다. 마음에 미움과 원한이 가득 담겼을 때 그 감정을 조금도 여과하지 않고 내어 뱉는 말이 독설이다. 사전의 뜻으로만 보면 독설은 그저 ‘독한 말’이라는 뜻에서 요지부동이다. 그러나 모든 말이 사전적인 뜻으로만 고정되지는 않는다.

2. 독설가들은 대체로 강한 자아를 도모한다. 그래서 독설의 마력에 빠지는 것이다. 독설은 독한만큼 강하게 전파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끌도록 한다. ‘주목받는 자아’를 쉽게 만들어 준다. 독설가들에게는 그 나름의 영웅심리가 있다. 정치적인 장에서는 독설을 하고 다니면 일정한 추종자들이 따르게 마련이다. 추종자들 또한 소영웅의 심리가 충일한 사람들이다. 추종자들의 박수가 자신의 영웅심리에 다시 최면을 건다. 이러한 영웅심리는 자신의 독설에 그 누구도 맞서지 못한다고 판단하는 순간 절정에 이른다. 더러워서 피하는 것을 무서워서 피하는 것으로 애써 착각하는 것이다.
독설의 마력은 독설을 구경하는 제삼자의 구경꾼들에게 훨씬 더 강하게 다가간다. 대중은 자기가 할 말을 후련하게 대신해 주는 독설의 마력을 즐긴다. 그러니까 대중의 독설 욕구는 대중들 자신의 콤플렉스와도 깊은 연관을 가진다. 독설을 뒤집어쓰는 사람도 대개는 잘난 사람이거나 잘난 척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기로 한다면, 독설이 힘을 얻는 사회는 무언가 억울함이 많고 공정함이 결핍된 사회일 수도 있다.
독설이란 공격의 일종이다. 독설 욕구는 공격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데서 생기는 것 아닐까. 공격에 많이 노출되었던 사람이 독설가가 되기 쉽다. 상대의 공격을 먼저 제어하기로는 독설이 딱 좋다. 또한 독설가 중에는 인정받고자 하는 강박관념에 갇혀 있는 사람이 많다. 그는 인정의 내용보다도 인정의 강렬함을 추구한다. 독설 자체를 희열로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일종의 가학성 쾌락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 모두의 근원에는 모종의 불안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아마도 독설꾼들은 그 누구도 모르는 불안의 콤플렉스를 깔고 사는 사람들은 아닐까.
독설은 권장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러는 독설의 능력을 선망하기도 한다. 독설이 무조건 악덕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까. 괜찮은 수준과 품격의 독설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경지의 것일까. 인터넷에서 설익은 악성 댓글을 보면, 독설의 정석을 일깨워 주고 싶다. 독설의 성공 조건 몇 가지를 생각해 본다.
첫째, 해당 주제에 대해서 상당한 실력과 내공이 있어야 한다. 권위가 느껴지는 독설은 보이지 않는 실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다. 독설에 욕설로 댓글을 다는 것은 실력의 빈곤을 보이는 것으로서 패배를 자인하는 것이다.
둘째, 상대의 오류와 결점을 이성적으로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독설이 빛을 발하는 것은 비판의 핵심을 잘 거머쥘 때이다. 독설이랍시고 논점 없이 감정적 배설로 대응하는 독설은 독설 축에도 끼지 못한다.
셋째, 독설에도 수사적 품격이 있다. 지적인 날카로움과 감성적 운치를 동반하는 수사적 기술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이런 독설은 응당 폭넓은 호응을 얻는다.
넷째, 독설은 싸움의 일종이다. 투사는 맷집이 좋아야 한다. 하루아침에 길러지는 독설 능력이란 없다. 상대의 독설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3. 북한 방송을 듣는 것 자체가 실정법 위반이 되던 시절, 굳이 듣고자 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해도 그것이 알려지면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그 시절은 불가피하게 북한 방송에 노출되던 때이기도 했다. 북한 방송의 출력은 왜 그렇게 강했던지, 대도시지역 일부를 제외하면 강력한 주파수의 북한 방송들이 아무데서나 터져 나왔고, 밤이면 더 심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한의 경제와 산업은 남한을 앞서는 면이 있었고, 그런 우월감을 바탕으로 대남 선전을 거세게 해댈 때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일종의 금기 영역이었던 셈인데, 어쩌다 귀에 들어오는 북한 방송 내용이 참으로 강렬하다 못해 그야말로 독설이었다. 오로지 상대에게 욕됨을 둘러씌우기에만 목적이 있는 말, 그런 독설이었다. 섬뜩하기 짝이 없는 표현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혁명의 그날을 위해 반동들의 숨통을 틀어쥐고 나아가자.”
“철천의 원쑤 미제의 가슴에 칼을 꽂고 놈들의 각을 뜨자.”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북한의 독설 표현들이 우리 매체에 의해 있는 그대로 소개되면서, 초기에 느꼈던 그들 독설의 그 맵고도 표독한 맛도 점차 시들해지고 말았다. 독설조차도 일종의 상투어(Cliche)가 되면서 아주 진부한 표현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설은 중독이 되기도 한다. 독설을 하는 쪽, 듣는 쪽 모두 독설에 대한 강한 내성을 키워나간다. 항생제를 자꾸 고단위로 처방해 나가면 마침내 항생제가 듣지 않는 내성이 생기듯 독설도 자꾸 하다보면 어느 정도의 독설로는 도무지 성에 차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자극적이고 더 가혹하고 더 민망스러운 독설을 해 나가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독설을 듣는 쪽에서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 버리면 막상 약이 오르는 사람은 독설을 날려 보낸 사람이다.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중독의 패턴이다.
독설이 독설로서의 긴장과 묘미를 발휘하려면 상황과 의미를 잘 담아내는 지적인 통찰이 들어 있어야 한다. 무조건 독하기만 한 것이 능사는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독설을 욕설로 대신할 때가 많다. 독설이 욕설과 등치(等値)를 이루는 대목에 이르면 독설의 매력은 반감한다. 독설이라고 했는데도 왠지 내가 그 욕을 뒤집어쓴 느낌, 즉 자기모독이 느껴진다면, 그건 내가 저급한 욕설을 하고 다닌 셈이다. 욕설은 감정의 절제 없는 배설일 뿐이다.
독설은 욕설이 아니다. 최소한 욕설이 아닌 수준을 유지함으로써 독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 독설도 그 나름의 품격과 미학을 대동하는 법이다.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온갖 독설 심사평도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다. 독설을 즐기고, 그런 독설에 열광하는 동안, 우리들 마음과 영혼이 조금씩 병든다는 것을 그 때 그 시절에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독설도 묘하지만 인생 또한 참 묘한 것이다.
박인기 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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