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추억이 필요한 아이들

2011.08.01 09:00:00

요즘 아이들은 방학이 되어도 무척 담담하다. 학교에는 가지 않지만 어차피 학원을 전전하며 별반 다를 것 없는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좀 더 공부하도록 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이번 여름방학에는 평생 잊지 못할 좋은 추억 하나 만들어주는 것이 어떨까?

방학이 와도 담담한 아이들
아이들이 기다리고 기다린 즐거운 여름방학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반응은 의외로 담담하다. “방학이 되서 좋으니?”라고 물어봐도 대부분 건조한 반응이다. 어차피 학교는 안 가지만 더 많은 학원을 가야한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방학은 마냥 즐거워하며 노는 시간이 아니다. 방학은 부모들과 아이들에게 새로운 스트레스의 시기로 다가온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방학 계획을 물어보면 딱히 특별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마치 의례히 매년 찾아오는 연례행사를 준비하듯 담담하고 차분하다. 어른들이 자신들의 경험에 비춰 보기에는 방학이 되면 친구들과 같이 신나게 놀 수 있을 것 같지만 요즘 아이들은 오히려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 더 적어진다. 친구들과 함께 놀 수 있는 시간들은 줄어들고, 방학이라고 해서 신나는 모험 같은 일들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들은 경험적으로 안다. 오히려 방학 동안에 아이들은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들이 더 많아진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서 방학에는 여러 단체에서 체험활동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필자가 있는 노리단(www.noridan.org)에서도 방학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활동 프로그램을 많이 운영한다. 그러나 의외로 빡빡한 학원 스케줄과 해야 할 공부 때문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청소년들이 참여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참여 신청을 하기 보단 체험활동을 통해 아이들에게 경험적 스펙을 쌓아주고 싶어 하는 정보 밝은 부모님들이 대신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아이들은 부모님의 통제 아래에서 방학기간을 보낸다.
노리단에서 운영하는 많은 청소년 대상 교육 워크숍 프로그램 중에 ‘소리배낭여행’이란 프로그램이 있다. 게임사 네오위즈가 운영하는 사회공헌재단인 ‘마법나무재단’과 함께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다. 바쁜 학생들의 스케줄을 고려해 하루나 이틀 안에 주변의 소리를 찾는 워크숍을 하고 음악을 만들어보는 압축적인 프로그램이다.
음악전문가들과 함께 아이들이 직접 가사를 쓰고, 작곡을 하면서 음악을 뚝딱 만들어 볼 수 있다. 여기서 만든 음악은 실제로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인 벅스(www.bugs.co.kr)를 통해 누구나 들어볼 수 있다. 워크숍에 참여한 아이들이 만들어낸 음악들은 하나같이 놀라웠다. 음악을 평소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고 있던 능력과 숨겨졌던 잠재성을 발휘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작년에 소리배낭여행 1기 캠프에 참가한 아이들의 노래 중 아래와 같은 노래를 추천한다.
무더위 속에서 진행된 작년 워크숍에서 아이들이 직접 작사한 노래에는 그 날의 무더위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방학에 바쁘고, 휴가도 못가며, 그래서 집안에서 뒹굴며 할 일 없는 자신들의 세태를 담담하게 노래했다. 마치 동요처럼 자신들의 감정을 꾸밈없이 이야기했다. 가사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살펴본 단어는 반복적으로 등장한 ‘추억’이다.

유년시절의 추억
사실 추억이란 단어가 어린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다. 중년 이상의 연령대가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쓰기 적합한 단어이다. 사전적으로 추억이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이다. 그래도 점점 애어른 같아지는 요즘 아이들에게도 추억이란 말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개념적으로 추억이란 단어를 ‘지나간 일의 경험적 인상’이라고 정의하기로 하자.
유년시절의 추억이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여러 위인들의 전기문에서 발견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직접 쓴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자신의 유년시절의 경험을 담담하게 술회한다. 그리고 현재 자신의 사고와 철학이 유년시절의 경험을 통해 어떻게 변화되고 연결되어 있는지를 분석한다. 또한 유년시절의 어떤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후 트라우마가 되었는지도 증언한다. 전쟁과 산업화가 한창이었던 1900년경의 유년시절 경험은 그의 사상의 토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벤야민을 좀 더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유년시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례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상가와 철학자들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자신들의 유년시절’을 재구성하며 그러한 경험이 자신의 철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문제는 유년시절에서 ‘무엇을’ 기억하느냐는 무의식의 선택적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적 경험들은 잊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도 있다. 이러한 기억은 대부분 인상적인 경험을 통해 구성된다. 벤야민도 유년시절의 자신의 기억은 ‘외부세계로 부터의 충격’으로 형성됐다고 이야기한다.

‘추억’이 필요한 아이들


실제로 청소년기 대부분은 내적세계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시기에 외부세계에 의해 변화가 많은 것이 특성이다. 그래서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외부세계의 경험을 주는 것은 현재의 청소년들을 다른 방향으로 자극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 그러나 세계가 안정화되면서 전쟁과 같은 급격한 사회변화를 접할 기회가 흔하지는 않다. 아이들은 보호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외부세계의 자극은 선택적이거나 축소된다.
대부분 외부세계의 자극은 일상적인 시공간이 아니라 비일상적인 시공간에서 이뤄지게 된다. 예컨대 집, 학교와 같은 일상화된 공간에서 새로운 경험과 자극의 정도는 낮다. 그리고 학기 중의 경험보다는 방학과 같은 시간에 그러한 경험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그래서 청소년들에게 방학은 새로운 외부세계와 조우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귀중한 방학에 대부분 청소년들은 방바닥에서 뒹굴뒹굴 거린다.
아이들은 기억하고 싶은 신나는 일들이 모험처럼 자신들에게 닥쳐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최근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이 늘어나며 아이들에게 그런 기회가 많아질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체험활동을 통해 학교에선 배우지 못했던,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많은 체험활동을 통해 아이들의 ‘추억’이 쌓여가는 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왜냐하면 체험활동이 양적으로 많아지고는 있지만 대부분 비슷비슷한 프로그램들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방학 때 아이들을 위한 체험교육 프로그램 자료를 살펴보면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지만 대부분 시중에서 쉽게 이야기되는 취미, 특기 생활의 연장에 불과하다. 독특하고 창의적인 프로그램을 찾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 체험활동은 교육적 효과를 위해 정교한 교안을 중심으로 매뉴얼대로 진행되며 학교 수업을 닮아가고 있다. 체험활동을 하는 아이들의 태도를 살펴보면, 학교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직된 모습이다. 아이들은 학교 수업의 연장선에서 긴장을 쉽게 풀지 못한다. 창의적 체험활동이 아이들의 창의성을 고양하기 위한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제공하기보다는 또 다른 주입식 학습의 연장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들을 지켜보면서 아이들이 교과 활동 이외에 배움을 얻는다고 하지만, 과연 그 시간이 아이들에게 소중한 추억의 시간이 될지는 의문이다.

순간의 교육
체험활동은 낯선 체험을 통해서 아이들 스스로가 깨닫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체험활동도 아이들이 모든 과정을 흥미 있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육 시간은 일정한 주기의 사이클이 있어, 지루할 때도 있고, 재미있을 때도 있어 아이들 반응은 순간순간 달라진다. 정해진 시간 모두를 흥미를 유도하며, 체험활동 전체를 즐거워하기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창의적 체험활동을 기획하면서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즐겁게 유지하면서, 아이들이 기억할 수 있는 결정적 ‘순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벤야민은 자신의 유년 시절의 기억은 단편적이더라도 기억하게 하는 순간(Moment)에 의존한다고 이야기한다. 벤야민은 “우리로 하여금 불가사의한 낯선 무엇을 깨닫게 하는 그러한 말이나 순간(Moment)이 있다”고 주장한다.
소리배낭여행의 예를 들면, 강사들과 아이들이 친구처럼 편안하게 서로를 대한다. 강사들은 보통의 어른들과 다른 이해심 많은 친구 같은 어른임을 먼저 어필한다. 강사가 먼저 다가가면, 아이들은 곧 따라온다. 먼저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우선 같이 놀면서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학습목표를 낯설지만 익숙한 단어로 메시지화해서 전한다.
처음 관계가 잘 형성되면 이후의 교육진행은 훨씬 쉬워진다. 아이들에게 일상적인 생활과 체험활동의 경계를 뛰어넘는 다른 경험이라는 것을 인지시킬 수 있다. 이후 아이들은 소리를 채집하고, 가사와 음악을 만들어보거나 뮤직비디오를 찍어보는 장시간의 교육 과정 속에서 자신만의 기억할 수 있는 순간들을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 워크숍 후 아이들에게 무엇이 가장 재미있었느냐고 물어보면 의견이 제각각 다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재미있었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 이유는 대부분이 평소 자기가 혼자서는 해보지 못할 것 같은 일들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상이 어느 정도 기억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소리배낭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을 음악으로 만들어서 언제든지 다시 들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가도 아이들은 음악을 들어보면서 그때의 일들을 추억할 수 있다. 이러한 마법 같은 하루를 함께하면서, 청소년들이 자라면서 몇 년이 지나도 기억할 수 있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창의적 체험활동의 목표가 돼야 한다.

우발성과 창발성의 교육
대부분의 성인들은 유년기의 모든 기억을 간직하지 못한다. 그러나 누구나 사소하더라도 강한 외부 충격에 의해 깊은 인상이 남은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대부분 잘 짜인 커리큘럼을 통해 기획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일상과 다른 우발적 경험에서 반응하게 된다. 창의성이 형성되거나 발생되는 지점은 그 순간이다. 창의성교육이 아이들을 창의성을 고양시키고 학습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무리 계획적으로 만든다고 해도, 그 안에서 아이들은 창의성을 더욱 발휘하기 어려워진다. 오히려 창의성을 위해서는 우발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우발적 순간이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아이들이 창의성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흔히 창의성은 다른 말로 창발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창발성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새로운 해결방법을 찾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방학이란 시간은 이러한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새로운 해결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인 것이다. 방학을 이용해서 그들에게 어른이 돼서도 기억할 수 있는 모험 같은 추억을 하나 정도는 선물할 필요가 있다.
양기민 사회적기업 노리단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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