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
학교 창 너머 연못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파문(波紋)이 어리연꽃과 함께 상쾌하다. 교무실 한편에 앉아 잠시 망중한을 즐기면서 10여 년 전에 퇴임하신 어느 교장선생님의 장모상(喪)에 다녀오신 선배 선생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참으로 많은 분들이 오셨더라면서 차 한 잔을 권한다. 그 맛이 정겹다. 나는 연락받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25여 년 전에 교무부장으로 잠깐 모셨던 그 교장선생님에 대한 추억을 더듬는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많은 감동을 주셨던 분, 화물(貨物)같은 분이었다. 화물(貨物)은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그리고 운반하는 사람 모두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준다.
“돈을 남기면 하수(下手), 업적을 남기면 중수(中手), 사람을 남기면 고수(高手)”라고 했던 일본 근대 정치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1857~1929)의 말과 함께 “그 교장선생님은 사람을 많이 남기셨으니 리더 중의 리더이신 것 같다”라는 결론에 이른다.
모 기업체 간부로 있는 친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부장까지는 어느 정도 능력이 중요했지만 그 이상 올라가려니 신뢰가 중요했고 능력만으로는 사람을 사귈 수가 없더라.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신뢰를 쌓으려면 먼저 베풀어야 한다. 그리고 바깥사람들보다 회사 안에 있는 사람들과 먼저 관계를 쌓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맥이라고 하면 바깥사람들을 떠올리는데 그게 아니다. 외부보다 직장 내의 관계가 먼저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잘하는 것, 그게 인맥의 시작이며 일로 만나는 고객이 인맥의 시작이다. 비즈니스도 인간관계이다. 풀리지 않는 문제는 결국 인간관계로 풀어야 한다.”
톨스토이 말마따나 지금 여기,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소설가 이외수는 게임 마니아인 아들과 소통하기 위해 열 손가락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게임 연습을 했다고 한다. 덕분에 케이블방송 온게임넷의 ‘켠 김에 왕까지’란 프로그램에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이 게임의 최종 목표인 왕까지 정복하느라 장장 14시간 동안 밥까지 굶어가면서 게임에 몰입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올해 65세인데도…
그러나 시인 나희덕은 <서시>에서 여전히,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라면서 마음의 군불을 제대로 피워내기가 쉽지 않음을 안타까워한다.
나 또한 경남여고에서의 마지막 4년째를 보내면서 그동안 ‘업적 남기기에 집착했던 것은 아니었던가’라는 아쉬움과 함께 이 세상에는 지금 여기 말고도 다른 세상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초심을 잃지 않고자 한다.
Soft Power
전임 한국과학영재학교에 교감으로 부임한 후 첫 몇 달은 참으로 힘들었다. 수업을 하지 않으니 아이들과의 친분도 별로 없고, 창의성이 중요하다고 아이들의 용의 복장에서부터 행동까지 ‘Let it be(?)’ 차원의 자율성이 강조되는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나의 상식 때문에 생긴 아이들과의 갈등이 나를 많이도 괴롭혔다. 학부모들과의 의견 차이도 나를 힘들게 하는 요인 중의 하나였다. 오죽했으면 전임지인 교육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말까지 했을까!
그러던 9월의 어느 날 “교감선생님! 기타를 잘 치신다고 하던데 이번 축전 때 저희들과 함께 연주 한 번 하면 안 될까요?” 몇몇 아이들이 나에게 던진 말이다. 10월까지는 한 달여 남았으니 한 번 해보자고 했다. 그들이 연주하는 8곡 중에서 2곡을 나에게 할애했다. 일주일에 1~2번 정도의 연습은 “교감선생님! 기타 잘 치시네요”라는 이야기로 이어져 명쾌하게 진행되었고 발표 또한 괜찮았다. 그래서 만나는 학생들마다 건네는 “교감선생님, 참 멋있던데요”라는 말 한마디는 인간적 소통이라는 큰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기타 연주가 인간적인 매력이었는지 모르지만 아이들의 마음을 얻는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종종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곤 한다. “소통의 본질은 설득이 아니라 공감이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Soft Power)은 곧 유혹의 힘이며, 유혹의 힘은 다름 아닌 매력이다. 또한 사회 발전과 변화의 한가운데에는 항상 문화력(文化力)이라 불리는 Soft Power가 있으며 리더로서 꼭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라고.
요즘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화제다. 그 중에서도 이 프로그램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만 해도 아는 사람만 아는 가수 임재범, 데뷔 이후 25년간 텔레비전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가 단 몇 주 만에 대중의 관심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혹자는 그 연유를 ‘삶의 아픔이 녹아든 최선을 다한 그의 노래에서 상처받은 외로운 이들이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하여간 그냥 편하게 베개 베고 누워서 TV 보다가 <여러분>을 듣는 순간 바로 일어나 앉아 보게 하는 그의 힘이 대단하다. 세상의 그 많고 많은 노래 중에서 그가 부르는 노래 한 곡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먹먹하게 하다니…. 각자 서 있는 곳과 바라보는 곳이 다른 많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게 하는 임재범의 매력에 박수를 보낸다.
미국의 비즈니스 컨설턴트인 브라이언 트레이시(Brian Tracy, 1944~)는 타임지에 소개된 100여 명의 유명인과 인터뷰를 하고 그 성공비결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 실력만큼 중요한 것으로 매력을 꼽았다. ‘얼마나 매력적인가가 성공의 열쇠’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설득력을 갖고 싶다면 매력적인 사람이 되라고 한다.
매력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끄는 힘으로 사람의 손이나 발, 머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인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에너지를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전문성 혹은 자신감과 감성적인 요소 등의 인간미에 의해 끌려간다. 자신감은 카리스마를 형성하고 매력을 발산하며, 사람들은 타인의 자신감 정도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굉장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능력 있는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그 사람의 성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자신감을 얻는다. 그것은 사람들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 매력,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가장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힘이기도 하다.
회사후소
구글에서 ‘리더’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최소한 3억 개 이상의 검색 결과가 뜨고,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리더십에 관한 책만 48만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그만큼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이다.
리더십은 그 어원이 ‘먼지를 뒤집어쓰는 것’이라고 한다. 리더십을 ‘동기부여의 예술’이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사람을 다스리는 기술이나 요령이 아니고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 마음가짐이나 행동과 같이 인간의 깊은 내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원활한 인간관계를 위해 일상생활의 규범으로서 예(禮)를 중요시해왔다. 예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수단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기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리더라고 하는 자리는 리더 자신의 끊임없는 수신(修身)에 의해 사물을 반듯하게 인식할 수 있는 완성된 인격을 형성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리더십의 본질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따라서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의 종노릇을 하는 것,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종노릇을 하는 것은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종노릇이란 서비스 정신이며 그것은 단순한 일방적인 ‘봉사’가 아니라 ‘너와 나의 가치를 높이는 것’을 말한다. 이제 21세기 리더십의 패러다임은 ‘나’라는 존재론에서 ‘우리’라는 관계론으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논어(論語)>의 팔일(八佾)편에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구절이 나온다. 공자가 제자 자하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어야 가능하다”라고 말했던 일화에서 유래한 말이다.
하얀 바탕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는 일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밖으로 드러난 형식적인 예(禮)보다는 그 예의 본질인 인(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적 바탕이 살아 있어야 삶의 무늬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며 리더는 인간적 바탕이 먼저라는 뜻이다. 그래서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라는 노래까지 있다.
뻔한 이야기
“남 험담하지 마라. 험담은 말하는 사람과 대상자는 물론 말을 듣는 너까지 세 사람을 죽인다. 그러니 험담은 하지도 듣지도 말아라.” 어릴 때부터 참으로 많이 들었던 이야기, 지금도 듣는 뻔한 이야기다.
진리는 뻔한 것이다. 사랑도 뻔한 게 좋다고 한다. 남들이 해보지 못하고 가져보지 않은 특별한 감정을 탐미하고 또 탐미했지만 결국 그런 어려운 목표 앞에 사랑은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남들처럼 만나서 좋아하다가 다투고 또 화해하고 때로는 작은 이벤트도 준비하는 그런 사랑이 좋다고 한다.
뻔한 것이라 해서 가볍거나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 속에 정말 큰 것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보약보다는 날마다 먹는 음식이 최고의 건강을 만들고, 수없이 반복되는 뻔한 일상 속에 진정한 성공이 있으며, 그냥 예사로 던지는 뻔한 말에 진짜 속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직장인을 위한 기도>라는 글귀 중에서 나에게 채찍을 가하는 문구들이다. 역시 그 바탕은 우리들의 일상을 차지하는 뻔한 이야기들이다.
고향 시장통에 가면 비계 섞인 돼지고기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 얼큰하게 끓인 김치찌개를 파는 아주머니가 있다. 그녀가 끓인 김치찌개는 참 맛있다. 일품이다. 그녀의 인생사는 잘 모르지만 식당을 운영하는 모습이 삶을 정직하고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 같아 김치찌개만큼이나 그녀의 삶도 일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을 일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김치찌개를 끓이는 것과 같은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일상이라도 열심히 살아내면 그것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일품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장맛비가 굵어진다. 스며들 곳이 막혀버린 아스팔트길은 금세 빗물로 넘쳐난다. 무슨 일이든 인위적 통제로 틈새들을 막아버리면 그 부작용이 뒤따른다. 따라서 틈새가 있어야 살아 있는 세상이다. 빈틈이 있어야 살아 있는 리더이다.
남들처럼 빈틈을 보여주고 웃어주는 교장이어야 한다고 후배들이 꼬집는다.
진정한 힘
미국의 물리학자 게리 주커브(Gary Zukav)는 <영혼의 의자(The seat of the soul)>에서 ‘진정한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든 형태의 생명을 보이는 그대로 사랑하는 힘, 인생에서 겪게 되는 모든 것에 대해 심판하지 않는 힘,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작은 미생물일지라도 의미와 목적이 있음을 깨닫게 하는 힘이다.”
진정한 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우리 영혼의 진화 방향이며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리더로 산다는 것은 남보다 높은 산을 오르면서 자신의 영혼을 진화시켜 가는 과정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유순함을 가르쳐 주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에게 조심성을 가르쳐 주며, 그리고 나에게 무심한 사람은 나에게 독립심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