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 불능의 아이들을 보면 양가감정이 생기게 마련이다. 따끔하게 야단치고 싶어지다가도 어쩐지 학생들이 불쌍하고, 가여워 보인다. 같은 아이를 보면서도 그들의 ‘행동’을 보는가, 또는 ‘감정’을 보는가에 따라 우리의 반응은 완전히 반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행동보다 감정을 먼저 보는 시각을 키우자. 넓은 시각을 가진 교사가 있는 곳에 행복한 학교가 있다.
수업시간에 딴짓하고, 소란 피우고, 장난치고, 말대꾸하고, 심지어는 교사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학생들을 보면 화가 절로 납니다. 그들의 미래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가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신 차리라고 따끔하게 야단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학생들의 얼굴에서 지겨움, 불안감, 우울함, 분노와 절망감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땐 어쩐지 학생들이 불쌍하고, 가여워 보이고, 안타까움이 생기면서 야단보다는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같은 아이를 보면서도 그들의 ‘행동’을 보는가, 또는 ‘감정’을 보는가에 따라 우리의 반응은 완전히 반대로 나타납니다. 아이들의 미숙한 행동을 보면 불편하고, 걱정되고, 화가 나면서 야단치고 싶어지지만 그들의 여릿한 감정을 보면 측은지심이 생기고 보듬어주고 싶습니다. 즉, 학생을 보는 시각에 따라 반응이 이토록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행동에 대한 지적, 비판, 지시 일색인 우리 교육
만약에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분명 아이들을 보살펴주기를 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아이들을 야단칩니다. 심지어는 매를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거나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정말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행동과 감정, 둘 다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우리는 흔히 아이의 감정보다는 행동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아이가 울고 있다고 합시다. 어른들의 반응은 “왜 우니? 또 찔찔 짜냐?! 뚝 그치지 못해!”등 행동에 대한 지적과 비판과 지시 일색입니다. 슬프거나 두렵거나 외롭기 때문에 눈물이 나올 텐데 그 감정들은 죄다 무시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공부해라, 밥 천천히 먹어라, 떠들지 마라, 숙제 빨리 해라, 게임 하지 말라고 했지…” 어른들이 아이에게 온종일 하는 말은 거의 다 행동에 대한 지적이고, 조언이고, 경고입니다.
결국 아이들을 마치 감정이 없는 기계, 또는 무시해도 되는 동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 결과, 아이들은 왕따 당하는 친구의 괴로움을 공감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두들겨 맞는 후배의 고통마저 전혀 느끼지 못하는 흉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 놓고는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이 공감 능력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훗날 ‘관심병사’나 사회 부적응자가 큰 사고를 치면 “세상이 어떻게 이토록 흉측해졌냐”며 어리둥절해합니다. 그리고는 군에서, 사고지역에서 허둥지둥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가히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 할 만합니다.
정서기반 학문의 시대 도래… 교육 변해야
왜 우리는 감정을 무시하고 행동을 주시하는 걸까요? 가장 큰 요인으로 1970년대부터 우리의 시각을 지배한 행동주의를 꼽을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는 요인(즉,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과학적 방법이 행동주의란 이름으로 심리학과 교육학에 도입되고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즉, 현재 어른들은 알게 모르게 행동을 선택하도록 훈련받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변하였습니다. 동물과 육체에 의존했던 농경시대에 이어 기계가 주도한 산업화 시대는 막을 내리고 지식기반시대라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고 있듯이, 분석주의와 행동주의는 저물고 정서기반 학문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성과 논리와 개인 중심에서 감성과 심리와 관계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옮겨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교육학도 변하고 교사관도 변하고 인재상도 변해야 하지요.
가장 먼저 변해야 하는 게 우리의 시각입니다. 이제 우리는 행동보다 감정을 먼저 보는 시각을 지녀야 합니다. 시각은 세상을 보는 눈이며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를 줍니다. 새로운 가능성은 세상을 새롭게 볼 때에 나타납니다. 아이의 감정을 포착할 줄 아는 시각을 지닌 교사가 있는 곳에 행복한 학교가 있습니다. 시각은 우리 각자의 선택입니다. 그러니 행복도 우리 각자의 선택입니다.
조벽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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